573돌 한글날 기념, 화순남면의 성치완 선생을 생각하다

사설
573돌 한글날 기념, 화순남면의 성치완 선생을 생각하다
  • 입력 : 2018. 10.01(월) 14:18
  • 김지유 기자 hoahn01@hanmail.net
일제강점기 때 화순남면 야학생들의 모습

곧 있으면 한글창제 기념일 573돌이 다가온다.
우리지역에서도 한글을 민족의 소중한 유산으로 알고 목숨을 담보로 지키고 보급했던 분들이 계셨다.
그중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글 보급에 앞장섰던 화순 남면의 진재眞齋 성치완成治玩 선생의 자취를 찾아가 봤다.

우리 역사에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과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훌륭한 선구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중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제 뜻을 펼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과 한글의 발전 및 수호를 위해 진력을 다 해 연구한 학자들의 업적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우리 고장 화순에도 한글교육과 관련 숨겨진 교육자이자 위인이 있다. 서슬 퍼렇던 일제치하 때 한글 교육을 통해 일제의 폭압에 저항하고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헌신적으로 가르침을 펼쳤던 진재眞齋 성치완成治玩선생이있다.
성치완成治玩선생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쳐 민족혼을 잃지 않게 하려는 의지 하나로 일제 강점기 하에서 10년 동안, 남면 살고 있던 아동들과 주민들을 헌신적인으로 한글을 가르쳤다.

성치완 선생은 1918년에 태어나 사평보통학교(초등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열다섯 살에 고옥현高玉懸 여사와 결혼한 후 가문의 번창에 진력하면서도 1934년에는 면내 아동 대다수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문맹 상태로 방치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 아동들을 모아 한글과 셈을 가르치는 ‘야학’을 시작하였다.
아동 15명으로 문을 연 야학은 학생 수가 70명에 이르렀고 10년 동안 면내 아동 대다수가 우리글과 우리말을 마음대로 활용 구사할 수 있도록 지도함으로써 암울했던 때에 이들의 가슴 속에 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특히 일본이 우리 민족의 혼을 송두리째 없애버리기 위해 한글 말살정책을 시행하고 있던 때, 야학 감독관청인 주재소와 학교 당국의 눈을 감시가 심했다. 성 선생은 매일 한글과 우리 노래를 가르치는 시간이면 미리 심어둔 연락원이 소식을 주도록 하여 야학 감독관이 올 때는 일본 책을 내 놓고 일본글을 가르치는 척했다. 감독관이 돌아가면 다시 한글을 지도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몸이 아파서 먹지도 서지도 못하면서도 야학생들이 오는 시간이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벌떡 일서나 가르치러 나가셨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선생의 마음 깊은 곳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이다.

선생은 또한 빈민구제에도 힘을 쏟았다. 광복 직전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인해마을 사람들이 굶주리자 자신의 논 세 마지기를 팔아 양곡을 확보하여 구휼하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다. 광복 후에는 화순군 농업요원의 부대표로 8년간 농사 지도를 하며 우리군의 농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생존해 있는 선생의 제자들(남면 검산부락의 이칠진 님 외 여섯 분)이 증언을 해 주었다.

성치완 선생의 한글 사랑과 지역 사랑, 애국정신이 지역후진들에게 길이 새겨지고 전승되기를 바라는 지역 원로들은 면민의 뜻을 모아 2013년 5월 25일 화순군 남면 복지회관에 그 분의 공덕비를 세웠다.
우연히 남면을 거쳐 가는 외지인들 중 선생의 비문을 읽어보고 “아! 남면에 이런 분이 사셨구나.”하고 감탄을 하며 알려지지 않았음을 안타까워 한다.

성치완 선생의 장남은 부친의 뜻을 이어 평생을 교직에 있으면서 2세들을 가르쳤다. 현재는 화순야학에서 배움의 때를 놓친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부친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성치완 선생 공덕비


김지유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