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인 국민농업전남포럼 상임대표

기해년 돼지띠 해가 간다. 그리고 경자년 새해가 지척에 와 있다. 이맘때쯤이면 한 해를 보내는 소회가 누구나 같을 수 없지만 나에게도 올해는 이런저런 일들이 끝까지 참 많았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 아쉽고 서운한 일, 안타깝고 슬픈 일,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 등등, 그래서 뒤돌아보면 늘 회한이 더 많이 남는 것이 요즈음의 심사이곤 하는 것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한 해를 그래도 이 정도 마무리하게 됨이 어쨌든 다행이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늘 도와주시고 성원해주신 지인들과 동지들, 은인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이때가 되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분이 아버지이시다.

5.18이 났던 1980년, 절망과 열패감이 온 세상을 휩싸고 있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고 눈도 많이 왔었다. 그런 겨울, 한 해가 가던 마지막 날, 버스가 끊길 정도로 눈이 처음 보게 많이 왔던 그날, 아버지는 본인의 성품처럼 갑작스럽게 다시는 못 오실 길을 떠나셨다. 향년 57세, 올망졸망 아직 어린 6남매 자식들을 남겨둔 채 총총히 저세상으로 가셨으니, 지금의 내 나이도 못 되는, 요즘 같으면 아직 ‘애기 나이’였다

‘묻지 마라 갑자생!’1924년 동짓달에 식민지 조선 땅의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인근 ‘달아실 간이학교’엘 들어갔으나 그것도 형편이 어려워 졸업을 못하고 그만두었다고 했다. 농사꾼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내던 중, 스물두 살의 청년은 일제에 의해 먼저 징용에 가신 큰형님의 뒤를 따라 중형과 함께 같은 날 일본으로 징용에 끌려갔다고 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두 아들이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고 충격으로 넋이 나가, 업고 계시던 큰아들 손녀를 놓아버려 무논에다 빠뜨렸다고, 그래서 그 뒤로 ‘망기가 찾아와 고생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징용을 가서 도쿄 부근의 흡사 지옥 같은 어느 군수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거의 매일 퍼붓는 미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속에서도 어찌어찌 살아나오셨다고 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5년 가을, 거의 빈손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건만 세상은 다시 좌우로 나뉘어 혼란스러웠고, 스물넷이 되던 1948년에 인근 마을의 규수를 중매로 만나 혼인을 하셨단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도 잠시, 세상은 시끄러웠고 그 속에서 20대 청년은 모두가 대접받고 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에 빠져 아마도 건준과 관련되어 마을과 지역에서 이런저런 역할도 하고 여기저기를 다니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1950년 6.25한국 전쟁이 터지고 그해에 다시 군대에 가셨다고 했다. 9.28 이후 수복이 되어 다시 국군이 들어오자 인공 치하에서 무슨 마을 책임을 맡은 것이 문제가 될 것 같아 당시 국군 군속이었던 동갑쟁이 마을 친구분을 따라 송정리에 있던 그 친구 집에 가 계시다가 거기에서 바로 군대에 입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7년여의 지긋지긋하던 군대 생활, 전쟁이 교착국면에 들고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피아 간의 일진일퇴의 공방이 치열하던 시기, 최전방 수색대에 배치되어 1개 중대나 연대 병력이 거의 전멸하는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나오셨다고 했다.

1957년 마침내 제대를 하고 돌아와 그 이듬해인 1958년 나를 낳으셨고, 평생을 농사꾼으로 사셨던 우리 아버지.
같은 연배의 친구분들이 거의 그랬던 것처럼, 세상 온갖 풍파 다 겪고 넘어오신 탓인지 술도 좋아하시고, 놀기도 좋아하시고, 가끔 노랫가락도 뽑을 줄 아시던 호방한 성격에다, 신문지 쭉 찢어 말아 피우시던 담배는 ‘전봇대’라 불리며 요즘 말로 하면 아버지의 ‘트레이드마크’였었다. 마을 이장도 십 년이 넘게 하시고 여기저기 출입도 하셨지만, 보리 베고 모심는 농번기에는 일을 해야 한다며 가끔 학교를 못 가게 하셨던 얄미웠던 아버지. 동네 상일꾼은 아니었지만 일손이 빠르고, ‘농사꾼의 의관’이라며 늘 빈 지게를 지고 다니시던, 우리가 말썽을 부리면 매를 드셨다가도 막상 못 때리시고 허허 웃고 마시던 아버지셨다. 명색이 대학까지 갔던 큰아들이 데모하다가 잘려서 집으로 왔을 때도 그냥 별말씀이 없으시던 무심했던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도 눈을 안 쓰냐며 역정을 내시던 아버지가 가신지 벌써 40년이 다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가 돌아가시던 해 아버지 보다 많은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 그런데도 철(?)이 없어서 아직도 이런저런 세파에 휩쓸려 살며, 요즈음이면 꼭 이런저런 회한을 곱씹곤 한다. 한 해가 또 가는데 만약 아버지가 지금 이런 나의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하얀 눈 대신 하염없이 눈물 같은 빗방울이 듣는데 생전에 좋아하시던 술이라도 한 병 들고 아버지 산소에라도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