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중 전남대학교 교수

태풍 ‘다나스’가 비를 몰고 북상하는 주말, 장마철 무더위를 느끼며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의 시를 읽는다. 그러니 먼저 눈에 드는 게 자연 비와 관련된 작품이다. 그중의 하나 <우후송만(雨後松巒)>이다. “비 개자 시원스레 목욕하고 나온 듯, 남기가 엉켜 푸르름이 뚝뚝 맺힐 듯. 멍하니 보다 마음 일어 한 수 읊으니, 내 온몸도 서늘하고 푸르러지네.(雨霽冷出浴 嵐凝翠欲滴 熟瞪發情吟 渾身化寒碧, 이하 인용 작품은 배규범 역)”
비 갠 뒤의 소나무 울창한 산봉우리를 보고 쓴 것이다. 비가 그치자, 구름에 가렸던 산봉우리가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른 솔빛이 비에 씻겨 한층 상큼해진 모습이다. 마치 비취빛 푸르름이 방울져 떨어질 듯하다. 그것을 바라보노라니 내 몸마저도 온통 차갑고 푸르른 산의 일부로 느껴진다.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요, 자연몰입이다. 장마철의 후덥지근함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다.

무의자의 시에는 이렇듯 비 온 뒤의 상큼함을 노래한 것들이 쉽게 눈에 띈다. <만청(晩晴)>이라는 작품을 하나 더 보자. 때는 장맛비가 잠시 갠 저녁 무렵이다. “점점이 열린 산 빛 물리지 않거늘, 씻겨 나온 꾀꼬리 소리 들을수록 새롭네. 고맙게도 늦장마가 특별히 한 번 개니, 이런 재미가 나를 위로해 주는구나.(點開山色看無厭 洗出鶯聲聽更新 多謝晩霖特一霽 着些滋味慰閑人)”
비가 그치고 구름이 올라간, 여름 산에서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속태를 벗어난 깨끗함이다. 세상의 온갖 티끌을 말끔히 씻어버린, 천연의 자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파에 물들지 않은, 실오리 하나 걸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무의자(無衣子)’라는 혜심의 호가 새삼 인상 깊게 다가온다. ‘옷 한 벌도 없는 사람!’ 가진 것 없는 무소유와 더불어, 꾸미지 않는 천연의 삶을 살았을 옛 선승의 자취가 떠오른다.

무의자 혜심(1178-1234)은 고려 후기에 활동한 이름 높은 승려였다. 특히 무신정변 이후 선종 중심으로 펼쳐진 불교혁신운동의 중심에 있으면서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문학적으로 이룬 업적도 가볍지 않아, 한국 선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긴 선구적 작가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가전체에도 족적을 드리워, <죽존자전(竹尊者傳)>과 <빙도자전(氷道者傳)>을 창작하였다. 불도의 수행자를 각각 죽존자와 빙도자, 즉 대와 얼음에 비유하여 고결한 성품을 찬양하였다.

덧붙이자면 무의자는 화순 출생으로, 아버지는 향공진사 최완이고, 어머니는 배씨 부인이다. 시호가 진각국사이었기에 화순읍에 지금 진각로라는 도로명이 있고, 자치샘과 학서도는 그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서린 유서 깊은 지명이다. 24세(1201)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어머니의 임종을 보고 출가하여 조계산에서 수선사를 결성한 지눌의 제자가 되었다. 33세(1210)에는 지눌이 입적하자 그의 법맥을 이었고, 이후 수선사를 이끌며 조계종의 기반을 다지다가,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무의자는 이렇듯 불가의 선승이었기에, 그에게는 당연히 선적 취향을 드러낸 시가 많다. 말 그대로 선시이다. 대체로 수행자의 무심(無心), 무욕(無慾), 무구(無垢)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양상인을 보내며 쓴 시에서는 “서리가 내려 봐야 억센 풀을 알 수 있고, 물에 들어가 봐야 키 큰 사람이 보인다네. 먼지 속 길에서 너를 시험하노니, 열심히 수행해 먼지 속에 묻히지 말게나.(經霜知勁草 入水見長人 試汝塵中路 埋頭莫沒塵, <送亮上人>)”라고 하여, 주변과의 대비를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본성을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힐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시로는 비교적 장편인 <고분가(孤憤歌)>를 통해 “사람이 천지 사이에 나서, 흰 해골에 아홉 구멍은 모두가 같거늘, 어떤 이는 빈천하고 어떤 이는 부귀하며, 어떤 이는 곱고 어떤 이는 추한 것은 무슨 인연인가.(人生天地間 白骸九竅都相似 或貧或富或貴賤 或姸或醜緣何事)”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가슴 속에 외롭고 분함이 쌓여, 날마다 달마다 자라 골수를 녹이도다. 밤은 길어 지루하니 언제나 새벽이 올까. 번번이 서창을 바라보며 울음 그치지 못하네.(胸中積孤憤 日長月長鎖骨髓 長夜漫漫何時曉 頻向書牕啼不已)”라며 하늘과 땅을 향해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천차만별은 모두 망상에서 비롯되니, 그러한 분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代天地答>).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더 또렷해지는 것이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이다. 비록 출가한 선객이었지만, 무의자 역시 속가의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훗날 고향을 지나면서는 눈물로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한번 고향집 떠난 지 열다섯 해이거늘, 이로부터 옛일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륵. 만나는 이 절반은 알지 못하겠고, 우두커니 생각하며 흐르는 물을 탄식하네.(一別家鄕十五年 此來懷古一潸然 逢人半是不相識 嘿思悠悠嘆逝川, <過古鄕>)” 그는 25세에 출가하며 화순의 고향집을 떠났다. 그로부터 열다섯 해가 지났다고 하였으니, 이때가 마흔 살 무렵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삶의 절정을 넘겨 고향을 찾은, 평범해 보이는 한 인간의 뒷모습에 여운이 감돈다.

무의자를 읽는 사이, 태풍 ‘다나스’는 점차 세력이 약해져 열대성 저기압으로 소멸되어 갔다. 그렇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이 순리이다. 장마도 무더위도 그렇다. 그것이 기승을 부리는 동안 잠시나마 번잡함을 내려놓고, 지나간 옛 일을 들추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