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중 전남대학교 교수

지난 가을을 지나오며 계절의 정취도 즐길 겸하여 몇 차례 화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2018 국화향연’과 ‘적벽버스투어’ 그리고 ‘만연산 치유의 숲’을 다녀왔던 일이 그것이다. 이런 탐방을 통해 예전과는 다른, 사뭇 아름다운 정경과 함께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먼저 ‘2018 국화향연’을 찾은 것은 지난 11월 초였다. 국화는 흔히 혼탁한 시류와는 타협하지 않는 은일자의 풍모나, 찬 서리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지절을 표상하는 꽃이다. 그러면서 일찍부터 가을을 대표하는 꽃으로 각광을 받아왔다. 때문에 으레 가을이면 국화를 소재로 한 축제가 여러 곳에서 열리기 마련이다. 화순의 국화향연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평범한 생각과 더불어,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곤 했던 화순읍 남산공원 일대를 찾게 되었다. 그것이 벌써 두어 달 전의 일이 되었기에 지금 그때의 느낌이 생생하지는 않지만, 국화향연에서 느낀 즐거움은 애초의 기대 이상이었다. 크게 잘 꾸며진 국화 군락의 규모나 조형은 물론이고, 각종 전시 및 안내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훌륭한 향연을 무료로 제공해준 화순의 넉넉한 인심이 매우 푸근하게 느껴졌다.

그 뒤 11월의 마지막 주말에는 ‘적벽버스투어’에 나섰다. ‘천하제일경’이라는 적벽에 진즉 한번 가보고 싶었으나, 제한된 인터넷 예약과 기다리는 순번이 번거로워 쉽게 나서지 못하였는데, 지난 국화향연에서의 감동이 답사의 발길을 재촉하였다. 하여 운 좋게 2018년 마지막 투어의 티켓을 얻어 하니움센터 주차장에서 버스에 올랐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가볍게 내리다 갤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비는 종일 계속되었고, 답사는 우비를 쓴 채 연무 속에서 이루어졌다. 기대하였던 적벽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해 다소 아쉽긴 하였지만, 그런대로 우중의 정취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옛 시가와 누정에 관해 공부하면서도 직접 가보지 못했던, 망미정과 송석정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좋았다.

‘만연산 치유의 숲’을 다녀온 것은 12월 말이었다. 만연산의 만연사와 선정암 일대는 예전부터 내게는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옛 학창시절 이곳에 소풍을 왔던 기억까지 더하여, 그런대로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불과 수 년 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 무등산국립공원의 일부로 자리매김되며, ‘치유’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멋진 감성 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건강오름숲, 하늘숲, 건강회복숲, 오감연결길’이라는 명명도 흥미로웠다. 굳이 지친 현대인이 자주 쓰는 화두인 건강이나 스트레스 등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쉽게 공감을 주는 테마 공간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런 외양을 넘어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빚어낸 아름다운 풍광에 이야기의 옷을 입혔다는 점이었다. 지난날 김삿갓과 정다산이 남긴 자취를 통해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관심과 흥미를 자극시켰음을 볼 수 있었다.

잘 알려지다시피 조선 후기의 김삿갓은 ‘병연’이라는 본명보다 ‘삿갓’이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방랑시인이다. 조부가 나라에 죄를 지은 폐족 신분이었기에 감히 하늘을 우러를 수 없다 하여, 그는 삿갓을 쓰고 죽장에 의지하여 각지를 떠돌다 고단한 생을 마쳤다. 그러는 동안 발길 닿는 곳마다 해학과 풍자로 세상을 조롱하고 비판하며 파격적인 작품을 남겼다. 특히 김삿갓이 57세(철종14)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곳이 화순의 동복 땅이었으니, 무등산과 적벽 일대가 바로 그가 노닐던 곳이었다.

이에 앞서 다산 정약용은 16세 때(정조1)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화순에 와서, 중형 정약전과 함께 만연산 동림사에서 글을 읽었다. 그러면서 인근 무등산과 적벽 일대를 유람하기도 하였으니, 자신이 직접 쓴 <동림사독서기>·<유서석산기>·<유물염정기>를 통해 이때의 행적을 뚜렷하게 남겨놓았다. 화순읍 동구리 만연사 가는 길에 ‘다산정약용선생독서기비’가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듯 만연산과 적벽 일대에는 김삿갓과 정다산의 자취가 선명하다. 특히 만연산 일대에는 수학기에 한창 견문을 넓히던 소년 정다산의 번뜩이는 호기가, 적벽 일대에는 만년에 든 노시인 김삿갓의 삶에 초연한 행색이 오버랩 된다. 그래서 만연산 치유의 숲 오감연결길에는 이곳에서 ‘독서를 하며 호연지기를 키우던 다산의 추억’이 강조되어 있고, 적벽투어의 해설사들은 김삿갓과의 인연을 애써 거론하였다. 또 국화향연의 조형물에 적벽동천을 부각시켜 김삿갓 퍼포먼스를 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이 곧 요즘 흔히 말하는 스토리텔링의 한 양상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사실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하여, 대상을 흥미롭게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화순 탐방에서 접한 이런 시도가 부분적으로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였지만, 모처럼의 나들이에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눈을 돌려보면, 우리 주변의 명승과 문화유산에는 아직 충분히 잘 인식되지 않은 숨어있는 의미가 많다. 그것을 찾아 가치를 부여하며 재해석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