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자신의 사진 앞에 선 서은 문병란(瑞隱 文炳蘭) 선생

지난 25일  서은 문병란 선생이 타계했다.  이제는 故人이 되신 선생을  기리며,  2013년 1월20일 진행했던 生前 선생과의 인터뷰 기사를 다시 싣는다. <편집자 주>

연회색 빛 겨울하늘이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날,
서은문학연구소(瑞隱文學硏究所)에서 처음 뵌, 민중(民衆)의 큰 시인(詩人) 서은 문병란(瑞隱 文炳蘭)선생은, 곱고 온화해 보이는 외모 탓인지 민중시인, 저항시인 보다는 오히려 서정시인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가 건넨 명함을 살펴보시며 잘 간직하겠다고 하시는 선생에게, 워낙 유명한 시인이라 저명성(著名性) 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조명해서 인터뷰 하겠노라고 말씀드리자 혼쾌히 승낙하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인 재능을 발휘했던 선생

선생의 고향은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 이다. 3남2녀의 막내로 태어 난 선생은 도곡 초등학교 3학년을 다녔고 4학년 되던 해 광주서석초등학교로 전학 하여 광주에 있는 집에서 형과 함께 살며 학교를 다녔다.

가업(家業)은 농업이었지만 한학(漢學)을 하시던 아버지는 농사일을 못하시고 어머니가 주로 농사일을 하시며 일주일에 한 번씩 광주를 다녀가셨다고 한다.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와 ‘촌놈’이라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하던 선생은 어머니가 다녀가시면 허전한 마음을 습작시 쓰며 달래곤 했다고.

선생이 광주서석초등학교를 다닐 時는 해방 직후라서 한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껏 한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당시 7.5조 율격의 ‘반달’이나 ‘고향의 봄’ 동요가사 영향을 받아 초등학생이던 선생이 쓴 시 ‘고향 계신 어머니’는 멜로디가 붙여져 동요로 만들어졌다.


그 가사를 보면,,


‘간절한 생각은 고향 계신 어머니
눈물 흘리면서 남쪽하늘을
홀로앉아 외로이 바라볼 때에
해님도 서산 넘어 고향 갑니다.’


마지막 구절 ‘해님도 서산 넘어 고향 갑니다.’는 자신의 어린 시절 시적(詩的)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선생은 설명한다.

이 시로 인해 선생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촌놈’이라는 놀림도 안 받게 되고 학급 반장에 전교 어린이회장까지 맡게 된다.

선생은 자신이 유‧ 소년(幼‧ 少 年)시절 시골에 살아서인지, 도시의 또래 다른 학생들에 비해 정신적으로 ‘조숙(早熟)’했었다고 표현한다. 봄이면 찔레꽃순 따먹고 삐비를 뽑아먹으며 봄 햇살과 뒹굴며 놀았고, 겨울이면 개천에서 얼음 위를 지치며 꽁꽁 언 손 호호 불어 녹이던 어린 시절 추억들과, 당시 시골은 도시에 비해 취학연령대가 높아 선생에게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다고 회상하며, 그로인한 ‘조숙성’은 선생의 시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남감 잘 만들던 어린시절의 선생

지금이야 물질문명의 발달로 여러가지 장난감들이 많아 어린아이들은 장난감을 사서 놀지만 선생의 어린 시절에는 장남감을 만들어서 놀았다.선생은 장남감을 잘 만들어 모형비행기나 영사기까지 만들어 놀았고 주위에서는 과학자나 발명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독서에도 관심이 많아 형들이 읽는 춘원 이광수의 ‘사랑’이라는 소설도 초등학교 시절 이미 독파(讀破)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괴테나 하이네, 톨스토이 같은 시인이나 문학가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우수한 학업성적과 뛰어난 암기력으로 ‘외우는 기계’라는 별명도 얻었으며 , 지금도 선생의 뛰어난 암기력은 지속 되고 있다.

￭다재다능했던 젊은 날의 선생

선생은 청소년 시절, 천부적으로 타고난 기억력으로 T.V가 보급되기 전 까지 영화를 보면 고향 시골마을에 가서, 라디오만 듣는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놓고 영화내용을 그대로 배우들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이야기해주었다.

또한 선생 자신이 직접 대본을 써서 연극도 하고, 당시 선생의 형(兄)이 교편 잡고 있던 도곡공민학교에 가서 특강도 했다. 선생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좋아하게 되고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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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한 선생

선생은 1959년 대학재학시 ‘현대문학’지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다형 김현승(茶兄 金顯承)의 엄격한 지도와 추천 작품 심사를 거치며, 탁마(琢磨)된 언어 표현과 정제된 따뜻하고 맑은 서정시 ‘가로수(街路樹)’로 등단한다.

등단 후 ‘꽃씨’, ‘손’, ‘조룡(鳥籠)의 새’, 등 괄목할 만한 시를 썼던 선생은 유신(維新)시대에 즈음하여 역사와 시대적 요구를 통감하고 ‘정당성’이라는 급선회 현실참여‧ 저항의 열기를 내뿜기 시작하여 그의 시적 변모에 대한 우려와 걱정과 기대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10월 유신과 그의 교단생활의 시련기, 거리의 교사 시절을 시작하며,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창작과 비평의 청탁으로 ‘땅의 연가(戀歌)’, ‘고무신’, ‘엉머구리의 合唱’, ‘나를 버리고 가신 님’, ‘겨울산촌’, ‘절교장’들을 발표하면서 민중 시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한다.

한편, ‘직녀에게’, ‘북한쌀’, ‘박타령’, ‘씀바귀의 노래’등을 쓰면서 5·18 민중항쟁을 뛰어넘는 통일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민중저항시인‧ 민족통일시인의 고난과 명예를 한꺼번에 짊어져야 했다.

‘정당성’, ‘죽순밭에서’, ‘땅의 연가(戀歌)’ 외 26권의 시집,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50년을 격한 지금에도 선생의 시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민주화 열린 시대 이후엔 교과서, 참고서, 방송교재, 작곡되어 부르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해를 거듭할수록 선생의 성가(聲價)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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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시세계(詩世界)

선생의 시세계를 질문하는 기자에게 선생은 “시인이란 민족이 살고 있는 역사를 통찰하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관념이나 주제를 가지고만 시인이 될 수 없다. 세계 속에서 우리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력가지고 상상력을 가미하여 미래의 이상과 꿈을 담은 창조세계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답한다. 또한 부조리에 대한 현실 비판과 거부도 할 줄 알아야 하고, 민족이 어디로 가야하는가도 고민하면서, 외국이 만들어놓은 남북분단을 우리 민족은 거부해야 되고, 시인이건 누구건 조국은 합해야 한다며 남북이 정서적 통일을 이루고, 남과 북이 모두 좋아할 수 있는 글을 ‘한글’로 써서 ‘국어정신(國語精神)’이 발휘되기를 염원한다고 말한다.

또한 선생은 “시인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속성 속에 진실이 있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한다.”고 강조한다. 아름다운 본질만 가지고 속성이 진실 되지 못하면 가치 없는 아름다움 이라고.

￭자신이 좋아하고 모두가 좋아하는 선생의 작품들

선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은 독자들이 공감하고 애독하는 시라고 하며, 자신의 작품 중 농민이나 민중의 삶을 노래 한 ‘땅의 연가’, ‘직녀에게’, ‘고무신’, 꿈을 이야기한 ‘호수’나 ‘희망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불혹의 연가’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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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땅, 고향 화순에 대한 선생의 사랑

선생의 첫 작품인, 초등학교시절 지었던 ‘고향 계신 어머니’ 노래는, 당시 2절까지였는데, 훗날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3절 가사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 3절 마지막 구절이 ‘ 이제 가니 어머니는 안계시고 무덤만 있네.’

선생에게 ‘시인의 정서’를 키워준 ‘어머니의 사랑’
선생은 그 어머니의 숨결이 흐르고 있는 고향 화순을 사랑한다.

선생은 정년 후 고향 화순을 자주 찾고 고향 사람들도 많이 만난다고 한다.
고향을 지킨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고향을 지키고 있는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협력, 보은(報恩)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發露)라고.

또한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풍아회(風雅會)는 고전과 현대가 만나 선현(先賢)을 기리고 현대의 풍류 및 한시 ,시조, 현대시들이 어우러지며, 지역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화순의 풍류와 문화를 지키면서 화순지역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있다.

선생은 화순군민신문과의 인터뷰가 선생자신과 고향 화순의 가교(架橋)역할이라 생각한다며 화순(和順)이 서로 화합하고 소통하여 지명(地名)처럼 아름다운 이름값을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덧붙여 선생은, 문학이나 시낭송을 배우고 싶은 화순지역민들이 언제든지 선생의 호(號)를 딴 서은문학연구소(瑞隱文學硏究所, 광주 지산동 소재)를 방문하면 문학공부도 하게하고, 조언 및 알선도 해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원로시인의 고향과 지역민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이다.

선생과 인터뷰를 마무리 할 때쯤 문득 밤나무가 생각났다. 밤은 땅에 뿌리면 밤에서 싹이 나와 꽤 자랄 때까지 밤 껍질이 어린나무 뿌리에 계속 붙어 있다고 하여, 밤나무를 근본(선조)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긴다.

제도권(制度圈) 아래서도 줄곧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하고픈 말을 다한,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믿는, 우리고장이 낳은 자랑스러운 시인 문병란 선생.
선생의 ‘희망가’를 읊조리며, 새해에도 문병란 선생의 평안을 빈다.

希望歌/문병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희망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마라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그림5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