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을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기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이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에게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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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문예’지에 실렸던 청마의 시‘행복’
지고지순한 마음이 구구절절 느껴지는 이 시는, 언제나 먼 거리에 놓여 있으며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인 정운 이영도(丁芸,李永道) 시인을 향한, 청마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그리움의 노래다.

또한, 애절한 시인은 돌아갈 수 없고 나아가 닿을 수 없는 현실적 굴레 속에서 비로소 싹을 틔우는, 사랑의 결핍과 부재가 현실의 불행과 아픔이 아닌, 그래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


유치환(柳致環,1908~1967)
시인·교육자.
본관은 진주. 호는 청마(靑馬).
시의 기교나 표현에 집착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진지하게 추구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특히 대표시 〈깃발〉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54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