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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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청춘에겐 청춘대로
어른에겐 어른대로
우리의 정서적 정거장 같은 시인’ 이라 표현한 기형도 시인

‘좋은 시’란 편하게 모두가 공감하는 시가 아닐까?

열무삼십단을 다 팔지 못해 집에 돌아오시지 못하는 엄마
어둠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숙제를 해보지만
일각(一刻)이 삼추(三秋)처럼 느껴지는, 엄마 기다리는 아이의 심정

성인이 되어서도 눈시울 뜨거워지는 유년시절 가난의 추억을 시인의 감각적 심상을 통해 묘사하여, 설령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고스란히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시'다.

기형도(奇亨度, 1960년 ~ 1989년)

대한민국의 시인 겸 언론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 입회한 것을 계기로 작품활동 시작. 1985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었으며 졸업을 앞두고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며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심야 영화 관람하다 뇌졸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