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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그의 고향이 화순? 아니다. 그의 고향은 주암댐이 생기면서 수몰돼 없어진 승주군 송광이다. 그는 4살때 부모님을 따라 광주로 이사하면서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잊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사업을 하기 위해 처가집이 있는 화순으로 이사오면서 화순이 가진 아름다움에 반해 화순을 그의 고향으로 삼았다.
지금은 가수, 한때는 축구선수
지금은 그의 앞에 ‘트로트가수’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그는 한때 축구선수였다. 광주서림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시작해 고3때 대우조선에 스카웃되면서 아마츄어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시합도중 몸싸움을 하다가 어깨부상을 당한 후로 운동을 접었다. 일찍부터 시작한 운동, 오랜동안 객지를 떠도는 선수생활에 회의도 느낀 터였다.
고교시절 운동을 하면서도 학교내 그룹사운드 ‘느룹’에서 보컬을 맡을 정도로 상당한 노래실력을 가졌던 김연수씨는 운동을 그만둔 후 광주에서 단기사병으로 근무하며 밤무대와 인연을 맺었다.
14년만에 밤무대생활 청산
그의 노래의 기본을 잡아준 위왕규 광주전남연주분과위원장은 만난 것도 그때였다. 위씨가 운영하던 업소에서 7년간 전속가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박자와 음정, 발음법 등 가수로서의 기본과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
자기노래 한곡 없이 밤무대에서 MC겸 가수로 활동하기를 수년, 그러다가 부인 전명주씨를 만나 1991년 결혼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와 함께 잠시 들른 7살먹은 자신의 딸이 아빠가 일하는 업소의 무대에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을 보게 됐고 이를 계기로 그는 14년만에 밤무대생활을 청산했다. 무명의 설움이 얼마나 크고 연예인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잘 아는 터라 아이들이 아빠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할까 겁이 나서였다.
다시 시작한 노래, 무대가 좋다
노래를 그만둔 후 처가가 있는 화순으로 이사와 사업을 시작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갖고 있던 재산도 다 잃었다. 막막했다. 결국 노래를 그만둔지 6년만에 빈털털이가 되어 다시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이곳저곳에 축제가 많이 생겨 굳이 밤무대생활을 하지 않아도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김연수씨는 무대에 서면 즐겁다고 한다. 물론 괴롭거나 힘들고 몸이 아파 무대에 서고싶지 않을 때도 있지만 자신의 말 한마디에 웃고, 노래에 즐거워하며 환호하는 관객들을 보면 걱정이나 아픔따위는 다 잊게 된다고.
이웃의 환한 웃음을 위한 조건없는 봉사
그 환한 웃음이 좋아 민요가수 허미라, 섹스폰연주자 신윤태씨 등과 함께 하늘사랑봉사단도 만들었다. 하늘사랑은 정기적으로 춘양의 노인복지시설인 소향원을 찾아 노인들에게 웃음을 준다. 물론 다른 지역에도 간다. 하지만 1원 한장 받지 않는다. 간혹 밥값이나 기름값 명목으로 얼마의 돈을 넣어주는 곳도 있지만 절대 받지 않는다. 돈을 받고 하는 것은 봉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물론 그 시간에 다른 무대에 서면 돈을 벌수도 있겠지만 그는 돈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한다. 지난 어버이날에도 소향원을 찾아 쓸쓸하게 어버이날을 맞는 어르신들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했다. 그런 그를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돈보다는 자신을 통해 어려운 이웃이 얼굴에 환한 웃음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게 더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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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생활 20년만에 가진 내 노래 “울지말아요”
김연수씨는 지난해 처음 자신의 노래를 가졌다. 가수라면 아니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대에서 자기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 그 역시 다를 바 없었지만 자기노래를 가질 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지난해 그의 오랜 무명생활을 지켜봤던 작곡가 김기범 선생이 ‘울지말아요’ 등 4곡을 그에게 줬다. 보통 ‘곡비’를 주고 곡을 가져오는 것이 통례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남에게 지지 말라”는 말이 전부였다. 그런 김기범 선생이 너무나 고맙다.
그는 지금 ‘울지말아요의 가수 김연수’라고 불린다. 물론 아직 그의 노래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그는 ‘내 노래’가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 노래를 부를 수 있어 더 행복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흥얼거릴 더 큰 행복을 꿈꾸며 오늘도 무대를 누빈다.
박미경 기자 mkp03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