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하는 바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매하에게 보은에서의 생활은 다가올 시간을 준비해 오던 그에게 질펀한 농토에 발을 붙인 현실의 삶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매하의 식견을 더욱 현실적이고, 폭 넓게 해주었다. 그런데 농민들의 삶을 지배하는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살벌했고 매서웠다. 이들의 편에 서고자 했을 때는 식민지배 36년보다 더 오래 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구질서와 구폐를 일소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복안을 세워두어야만 했다.
이렇게 앞날을 바라보고 계획하는 매하를 일본인들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산중에까지 매하를 찾아와 회유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매하 한 사람만 뜻을 꺾어준다면 자신의 영달뿐 아니라 가족들과 자식들의 앞날을 보장할 수 있었을 텐데 매하는 단호히 거절했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했던 매하는 그들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 그저 담담한 조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매하의 무심해 보이는 미소 뒤에 담겨진 속뜻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시 국내에는 연합군의 진주가 예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국경을 넘어 평양과 함흥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이어 행정을 맡을 민정부(民政府)를 설치하여 북한의 행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미군은 이보다 늦은 9월 7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미군은 군정청(軍政廳)을 설치하여 모든 행정을 관할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각기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행정권을 장악한 두 군정은 각자의 이데올로기에 부합되는 정치세력을 육성시키는 데 주력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한민족의 요구나 기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원활한 군정지배를 위한 조치가 우선시 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에선느 초기에 조만식(早晩植) 등과 같은 민족주의자와 현준혁(玄俊赫) 등의 공산주의자를 모두 포용하였으나, 이내 민족주의자들은 축출되고, 공산주의 정치체제가 정비되었다.
한편 북한보다 늦게 군정이 들어온 남한에서는 통치권의 여백은 연합군이 진주하고 충칭[重慶]에 있는 임시정부가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송진우(宋鎭禹) 계열과, 우선 민족을 대표하는 기관부터 설치하자는 여운형(呂運亨) 계열이 있었다.
여운형 계열은 먼저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치안의 확보와 식량대책의 강구를 모색하는 등 실제적인 정비사업을 발 빠르게 추진했다. 조직은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지방에 145개 지부가 생기고 곧 일제청산과 민생에 관련한 제반 사업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