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하는 장성한 이후에는 도회지에서 학교생활을 했기 때문에, 식민치하의 농촌의 생활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보은에서의 생활은 찐득거리는 땀 냄새가 배어있는 민초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전해들을 수 있던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이제 매하의 심안은 더욱 넓어졌으며 그동안 그가 보지 못했지만 이 땅에 뿌리박고 소리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매하의 가슴에는 새로운 도약과 도전의식이 싹 틔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해방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껴질수록 더욱 강해졌다.

당시에는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보통의 시골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보려면 읍내 장터에나 나가봐야 뜬소리라도 귀동냥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속리반 벽촌 마을의 상황이야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상 물정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마을 주민에게 매하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마을의 유일한 눈과 귀가 되어주는 매하로서는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바깥의 소식을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라디오는 매하에게 가장 신속하고 유일한 창구노릇을 했을 것이다. 라디오로 전해지는 시세파악을 통해 마을에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앞날에 대한 동향을 가늠해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패망을 확인한날에는 어떤 매체도 전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전했다고 한다. 매하는 이렇게 마음속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당기고 있었다. 그간의 교육 사업이 백년을 바라다보고 짓는 농사였다면, 밭두렁의 민심들은 당면한 현실이자 이 땅의 지배제도에 억압받던 민초들의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었다.

식민지조선의 현실이 일본이라는 제국주의국가의 만행이 벌인 비극이라면, 조선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논두렁 민초들의 현실은 누대에 걸쳐 대물림되어 온 지배구조의 모순이 낳은 비극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온 사회 정치제도의 불합리는 식민지배 이전부터 이 땅의 민초들을 옭아매고 채찍질하는 근본적인 압제였다.

그는 고통의 세월을 강요했던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독립운동 이상으로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조선 백성이라면 절실한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해방을 맞는 것이었지만,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진실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지배구조와 구질서가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