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해방이 그런 변수와 함께 다가올 것을 예측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매하에게 있어서도 그런 현실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거대한 힘의 역학관계는 우리 민족의 뜻과는 상관없이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 모든 것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매하와 그의 가족들은 전연 연고가 없던 속리산 깊은 산골마을을 새로운 터전이자 은신처로 삼았다. 당시는 이미 양천(兩賤)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된 지 오래였지만, 대대로 양반지주들을 섬겨오던 농민들의 뇌리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양반들은 여전히 농민들에게는 관습적인 지배자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에게 식자께나 들었다는 타지방 출신의 서생의 출현이 반가울 것은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매하의 생활은 뜻밖이었다. 꼭 고향마을에 돌아온 것 마냥 마을사람들과 밭두렁에서 자리를 펴고 막걸리잔 나누기를 즐겼고 소탈하기 그지없었다. 학교에서는 동료교사들과 학생들을 선도하는 입장에서 늘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했던 그였지만, 마을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격의 없는 지기가 되었고, 선배가 되었다. 그렇게 매하는 낱선 서생에서 친근한 마을의 중심으로 자리잡아갔다. 광주에서 정리해온 살림이 얼마 되지 않고, 서툰 시골생활에 가족들의 고생은 막심하였지만, 매하와 마을사람들의 교유는 그렇게 매하가족들을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 시절 교육자로서 매하의 임무가 휴지기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속리산골에는 배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높다란 산자락과 깊은 골짜기에 가로막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짧은 지식에 의존하여 살아온 순진무구한 이들이었다. 이 나라의 백성임이 잊혀진 채 어느 계몽운동의 손길도 미치지 않았던 이들에게 매하는 처음으로 맞게 되는 선생이 되었다.

그동안 드높은 산에 가로막혀 전해지지 못했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나라의 운명, 우리 민족이 처한 상황이 밭이랑, 정자나무 아래와 같이 마을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교실이 되었다. 때로는 선생이 되기도, 거꾸로 학생의 입장이 되기도 하며 매하와 마을사람들은 사귐의 정을 나누었다. 속리산 산골마을이 해하의 새로운 학교가 된 것이다.

한편 매하 역시도 마을사람들에게 학생이 되기도 했다.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 속에는 산간벽촌 밭두렁에서 흐르는 민심이있었고, 이 땅의 민초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세상, 꿈꾸는 세상에 대한 목소리가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