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서의 기다림은 2년여가 넘게 지속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그의 큰아들마저 창씨개명의 압박에 못이겨 직장을 그만 두었으니 매하의 가족들이 살아갈 앞날은 막막하기만 했다.

차에서 내려 50리 이상을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속리산에서의 은거는 그의 가족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정도였다. 농사도 지을 줄 몰랐지만, 그나마 농사를 지을 땅도 없었다. 겨우 온 집안 식구가 비를 피할 정도의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기소침해 있을 매하가 아니었다. 그는 빈한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라디오를 장만해서 외부의 소식을 접하면서 일본의 패망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저차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초야에 묻혀서 한가로이 소일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매하 정도의 인물을 초야에 그대로 묻혀둘 그 지역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는 일제와 그 앞잡이들에게만 비밀이었을 뿐이었다. 전북 지역의 명문 고창고보를 세운 그의 이름은 보은 지역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 시기 민족의 자긍심을 세운 자부심의 하나였다. 많은 인사들이 그의 초막을 찾아왔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연스럽게 그는 벽촌에 불과했던 보은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런 그의 존재는 바로 이들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었다. 매하는 이렇게 행방을 기다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일본이 오래 가지 않아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그때도 속리산까지 일본인들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회유했지만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곧 일본이 망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저 황당하게만 들렸는데 얼마 후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지요. 국제적인 정치질서나 역학에도 뛰어난 통찰력이 있으셨습니다.”

그의 손자 양형렬의 말처럼 매하의 2차 세계대전의 흐름에 대한 판단은 옳았다. 일본이 더욱 강하고 거세게 조선을 압박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절실하단느 것이었으며 또 그만큼 해방의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고 조선은 일제에 의한 3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해방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반도 내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설정한 38도선을 경계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진주하게 되면서 해방된 조선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