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가운데서 민족지도자의 뜻을 버리고 변절하는 변절자들의 행동이 차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제가 조직한 보국정신대의 기수가 된 이광수·최린·모윤숙·최만식 등 이루 나열하기 힘들 정도의 인물들이 그 흐름에 동참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본의 승리와 일본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기가 눈앞에 닥쳐왔음은 불멸의 진리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매하의 판단은 그들과는 달랐다. 그것은 매하의 믿음이었다기보다는 그의 명확한 정세판단에서 온 것이었다. 이광수와 같은 문인들은 소년병들을 모집하기 위한 글을 쓰고, 각지에 학도병과 지원병을 모으기 위한 연설에 나섰다. 그러나 1943년 고비로 일본의 승승장구는 제동이 걸렸고, 각지에서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일본은 병력의 질이나 숫자, 군수에서나 정쟁물자의 기술적 수준에서나 한계를 맞게 되었다.

바로 이런 시점에 그런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병력 동원에 나섰던 인물들이었으니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현실 인식이 얼마나 편협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사회적인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대부분의 인사들이 일제에 의해 동원되어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을 등지는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일본 당국이 전남지사를 통하여 매하에게 전남 3개 도시(광주·목포·여수)에 가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번 해주면 상당한 이권을 주겠다고 유인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제안이 매하에게는 사형선고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로 받아들여졌다.

이후에도 일본 당국의 매하에 대한 유혹과 협박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매하는 계속되는 협박과 회유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홀연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세상을 등질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결심을 하는 데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수많은 민족지도자가 이 시기에 친일로 돌아서고 변절해버린 사례를 감안할 때 매하의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자신을 비롯한 식구들의 고충은 불을 보듯 명확하고, 부귀영화에 대한 미련도 남았겠지만, 분연히 일어서 속리산으로 향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매하는 자신의 은거가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명철한 역사인식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일본의 사정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이었고,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은 곧 닥칠 현실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매하의 기다림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의 고통과 상처는 너무도 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