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산업역군으로 추앙 받았던 광부들은 석탄 산업이 사양화되면서 탄광을 떠나야 했고 진폐증으로 신음하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진폐증 환자들은 전국적으로 3만 여명으로 추산되며 화순지역에도 진폐환자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으나 특별한 대책 없이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이 다가 가고 있다.

이에 광주 CBS 조기선 기자의 연속 기획보도 <산업화의 그늘, 진폐환자의 끝나지 않는 고통> 기사를 CBS측의 협조를 얻어 “진폐환자도 인간답게 살게 해달라”는 그들의 외침을 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연재 기사를 싣는다.(편집자 주)

재가 진폐환자들은 합병증 판정을 받아야 정부의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합병증이 발견되면 주변의 축하를 받는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진폐 판정 절차를 단순화하고 합병증 인정 범위를 넓게 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 중이지만 노동계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전남 화순광업소에서 11년 동안 광부로 일했던 서금동씨(87).

서 씨는 10년 전부터 진폐 검진을 받을 때마다 진폐가 의심된다는 ‘진폐의증’ 판정을 받았지만 합병증 판정을 받지 못해 제대로 된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올해 정밀검사에서 폐결핵과 폐기종은 물론 폐암 등의 합병증이 발견돼 뒤늦게 진폐 요양승인을 받고 화순 성심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서 씨는 10년이 넘도록 진폐를 앓아 오면서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이 들고, 혼자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된 지 오래다. 하지만 10년 이상 ‘진폐의증’ 판정을 받았던 서 씨는 진폐 합병증으로 말기 폐암을 얻으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됐다.

서 씨의 아들 서종훈씨(60)는 “결핵과 폐기종에 폐암까지 합병증이 나타났는데, 지금 아버님은 폐암 발병 사실은 모른다.”며 “직업병에 걸렸지만 그나마 요양승인이 나서 가족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고, 이제는 좀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탄광에서 일한 서 씨의 아들 종훈 씨도 진폐를 앓고 있지만 15년째 진폐 판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종훈 씨도 점차 숨이 차는 등의 진폐 증상이 나타나고 있어 아버지 서 씨는 대를 이어 탄광에 다니다 진폐에 걸린 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서 씨는 “탄광에 다닌 사람들은 다 진폐가 있는데, 나이가 들면 폐가 약해지고, 진폐가 나타난다.”며 “아들이 이제 환갑인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 답답하며.”며 아들 걱정을 했다. 17년 동안 탄광에서 일했던 송유열(70)씨도 지난 9월 영남대학병원에서 폐암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도 송 씨는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정밀검진 때마다 ‘진폐의증’ 판정'을 받았고, 지난 3월 검사에서는 급기야 '정상' 판정을 받았다. 송 씨는 현재 노동부를 상대로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진폐환자들에게 진폐 합병증이 발견되면 주변의 축하를 받는 ‘슬픈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진폐환자가 요양승인을 받으면 휴업급여와 요양비 등을 받기 때문에 생활비가 해결되지만 요양승인을 받지 못한 재가환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는 물론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진폐 요양승인을 받으면 동료 진폐환자의 축하를 받는 '웃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진폐 판정 절차가 까다롭고 진폐 합병증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 진폐증 판정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진폐환자들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 실제로 한림대학교 성심병원 산업의학과 주영수 교수팀이 지난 5월-6월 강원 남부지역의 재가 진폐 환자 1,25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5.9%가 진폐증 판정결과에 만족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폐 판정에 만족하지 않는 이유로는 ‘판정의 공정성이 없다’는 응답이 68.8%로 가장 많았고, ‘주치의 소견과 심사의의 견해가 다르다’는 응답도 22.3%에 달했다. 이에 따라 노동부는 노사정 논의결과를 토대로 진폐 판정 절차를 단순화하고 합병증 인정 범위를 넓게 하는 방향으로 진폐 판정과 검사 방법을 대폭 개선할 방침이다.

노동부 조병기 산재보험과장은 “진폐 판정을 하는 데 2개월 이상 장기간이 걸려서 이를 단축하고, 정밀 검사도 현행 4박 5일에서 2박 3일로 줄일 계획이다. 또 검사항목도 단순화하고 정밀검사 실시 여부는 의료기관에서 선택해 실시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또 노동부는 논란이 되고 있는 합병증 인정 범위와 관련해서도 9가지 합병증은 그대로 유지하되 합병증 검사의 경우 증상별로 검사방법을 표준화할 방침이다.

이밖에 의학적 사유로 심폐기능 검사가 불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연령과 진폐 병형에 따라 장해등급을 판정하는 방안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노동부의 진폐 판정 절차 개선 추진에도 불구하고 노동계에서는 여전히 진폐 판정이 진폐환자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는 “합병증을 판정하면서 기관지염의 경우 1년에 몇 개월 이상 가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엑스레이 1장 한 번 보고 기관지염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문제다.”라고 말했다.

진폐 판정을 할 때 주치의의 소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산재 사목실 세실리아 수녀는 “합병증 문제에서 실제 환자를 보는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가장 잘 알 수 있는데, 엑스레이나 폐 기능 검사만 가지고 판정을 내리는 것은 문제가 많다.”며 “합병증 기준에 충족되지 않을 뿐이지, 재가 환자 대부분이 합병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진폐제도 개선 과정에서 독일이나 일본처럼 주치의의 소견을 존중하고 진폐 판정에서 노동자들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진폐제도가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광주CBS 조기선 기자 rainmaker@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