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앉아서 - 최남선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이해와 감상)
조선의 3대 천재 최남선의 시. 청소년 시절 처마자락에 주룩 주룩 비가 내려 낙수지면 이 시를 외면서 얼마나 감미롭고 애틋했던가. 쉽고 단순하면서도 마음의 비밀을 그림같이 그려내고 있는 시조. 피가 되고 살이 된 언어들. 청마는 바람이 부는 날에 그토록 못견뎌했는데, 육당은 비오는 날이 만만찮았나 보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 져서 소리하니.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비유를 기억하리라. 처음엔 "비도 아닌 것을"하고 무시했는데 그 비에 옷이 다 젖어버렸다. '가만히'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말인가를 일깨워주는 시다. 비가 가만히 온다. 가만히 오는 비가 그렇듯이, 그리운 생각도 모르는 사이 방울져 낙수소리를 낸다.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육당은 시조의 글자 수를 정확하게 지키면서도 우리말의 호흡과 억양을 정겹게도 살려낸다. 이 대목은 화담 서경덕의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를 살풋 변주한다. '어느 님 오리마는'이 '일도 없이 기다려져'로 단도직입하면서 싱숭생숭한 기분을 돋을 새긴다.

'일도 없이'란 말이 기막히다. '일 없어'라고 말할 때의 그 턱없음을 암시하면서, '그냥 까닭도 없이'란 뜻으로도 닿으니 참 알맞다. 앞의 구절에서는 자연 풍경이 나오고, 그 뒤에 인생의 곡절이 간략하지만 만만찮은 내부를 엿보이며 등장한다. '오마지 않은 이'란 말에는 야속한 기분이 숨었다. 온다고나 말했으면 희망이라도 있었겠지만 그런 귀띔도 없었다. '일도 없이'가 나온 것은, 저 희망의 조도(照度)를 낮추는 마음의 턴 오프이다. 나는 보고 싶은데 저는 오겠다는 말도 없이 가고 없으니, 비 죽죽 오는 날 독수공방하는 사람의 환장할 그리움이야 훤히 짚이지 않는가.

뭐니 뭐니 해도 이 시조의 백미는 마지막 구절이다.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열릴 듯 닫힌 문'이란 말에 어린 내가 숨을 헉하고 멈출 만큼 짜릿했다. 사람 기다려본 사람은 저런 문을 몇 번은 쳐다봤으리라. 문은 닫혀있는데 금방이라도 삐꺽 하며 열릴 것 같다. 계속 바라봐도 매양 가만히 닫혀 있는데, 그래도 또 생각을 키우면, 문득 슬며시 열릴 것 같다. 그게 '열릴 듯 닫힌 문'이다. 마음과 시선이 자꾸 따로 놀며, 눈알만 멍멍해지는 문이다.

빗소리란 게 꼭 발자국 소리 같을 때가 있다. 귀가 듣고 싶은 소리가, 제 멋대로 돋아난다. 문 밖에서 그 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한다.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는 그런 마음이 밀어낸 눈길이며 고개 짓이다. 어, 혹시, 그런 물음표들이 슬그머니, 급박하게 생겨나면서, 몇 번이나 속은 고개짓에 다시 속는다.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화담의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의 기분을 다 내면서도, 그 시품(詩品)을 만 배는 업그레이드한 이 구절만으로, 최남선은 국어를 일류로 닦아낸 놀라운 사람이다. 친일 명찰을 붙인 뒤로, 우린 좋은 시에 대한 감별이 둔해진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보여주었던 친일행위를 제외하고는 시인·수필가로서의 문학적 업적과 계몽주의와 민족주의를 견지한 사상가·출판인으로의 공헌, 조선의 상고사를 재건하려는 역사학자로서의 노력 등 다방면에 걸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이와 같은 문학·역사학 방면의 활동은 언론인·사상가로서의 측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이광수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공적이다.

저서로 〈경부철도노래〉·〈한양가〉·〈세계일주가〉가 있고,〈백팔번뇌〉·〈시조유취〉·〈백두산근참기〉·〈심춘순례〉·〈금강예찬〉·〈반순성기〉 등의 문학적 관심을 표명한 것, 〈조선역사강화〉·〈아시조선〉·〈불함문화론〉·〈고사통〉·〈단군론〉·〈조선독립운동사〉 등의 역사와 민족문화에 관계된 것, 〈살만교차기〉·〈조선불교〉·〈조선의 신화〉·〈조선의 민담 동화〉 등의 종교와 민속에 관계된 것, 〈신정(新訂) 삼국유사〉·〈대동지명사전 大同地名辭典〉·〈신자전〉·〈신교본(新校本) 춘향전〉 등의 고전 정리와 주석에 관계된 것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에서 〈육당최남선전집〉(15권)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