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의 동백꽃

바람 불어 설운 날에 후두둑 지는 꽃 동백
겨울꽃이란 모진 찬바람을 맞으며 함박눈을 맞아 여느 나무인들 꽃을 피워 내기란 어렵다. 청청한 푸른 잎을 펴고 있는 소나무가 있기에 세한(歲寒)의 기품을 느낀다. 또한 그에 못지않은 세찬 눈보라 속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는 설중매가 있어 기품을 겨룬다. 이런 개결한 선비의 꿋꿋한 품성을 느끼게 하는 나무와 달리 따스한 기운으로 맞아준 겨울 꽃이 동백(冬栢)이다.

남녘 바닷가에서나 갯바람을 받으며 무리지어 숲을 이루는 동백은 다소 얌전한 자태로 줄기를 뻗어 올려 그 줄기마다 소담한 붉은 꽃을 피워 낸다. 동백꽃으로 이름난 명찰(名刹)은 역시 선운사가 제일이다. 겨우내 얼음이 녹아 버들강아지 눈망울이 뜨일 때 한반도 서남단 노령산맥의 갈재 서북쪽 물을 모아 흘러내리는 인천강(仁川江) 민물은 이쯤에 서해 바닷물과 어우러져 줄포만 바닷가로 나가는 길을 버리고 장연강(長淵江)을 따라 꺾어 들면 바로 선운사이다. 춘삼월에 장독대 떠진다는 말이다. 군데군데 잔설이 깔린 한적한 산사는 쓸쓸하게 길손을 맞아준다. 잔뜩 기대했던 선운사 동백꽃은 꽃망울이 떠지면서 주절주절 맺혀 있다.

친필로 쓰여진 서정주 시비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입구에 친필로 세워진 미당 서정주 시인은 전라도 맛을 그렇게 가슴에 묻어놓듯이 막걸리잔 들고 박주 한잔에도 멋스러운 목마른 마음을 적시어준다.

선운사
선운사 걸어서 생태 숲 고운 길은 자주와도 새로운 듯이 반겨만 준다. 자연은 사시사철 변함없다. 인간의 마음은 시절마다 인심 따라 속세에서 떨쳐 버리지 못해 또 이 길을 찾는다.
속세와 사바의 세계를 뒤로 하며 사천왕문 앞에서 숨을 고른다. 현판은 명필 원교 이광사의 유려한 글씨에 도솔산 선운사 현판은 현세의 대가 일중 김충현의 선생의 글씨 예서체가 돋보인다. 선운사에 돋보인 건물은 만세루이다. 기둥나무 들이 뒤틀린 듯 맞춰서 있다. 절을 지으면서 남겨진 기둥들을 활용한 개성과 감각적인 맞춤들이 가히 감탄이다.

백파선사 석전(박한영)으로 오늘에 맥을 잇다
백파(白:1767-1852)스님은 고창에서 태어나 18세 때 선운사의 중이 되었다. 출가의 동기는“한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모두 천상에 난다”는 말을 듣고 그런 효심에서 출가를 한 것이라고 한다. 백파는 23세 때 지리산 연원사의 설파(1707-1791)을 찾아가 스승에게 구족계를 받아 율종의 계맥을 이어가며 50세 때「선문수경」을 지어 당시 불교계의 일대 논쟁을 일으킨다. 한국사상사에 빛나는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자체가 얼마나 행복일 일인가. 백파와 초의선사의 논쟁은 그 제자들로 이어졌다. 백파스님은 쇠잔한 불교계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어 지리산 화엄사에서 1852년 세주 86세 범람 68년으로 세상을 떴다.

선운사 입구의 이 백파비문은 추사체의 진면목을 볼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에도 대표적인 글로 꼽힌다. 지나치기 쉬운 입구에 새로 조성한 비석에 느끼는 힘찬 글씨다. 탁본흔적들로 비문이 반들거린다.

선운사는 최근년에 석전(1870-1948)선사가 크게 활동하여 선운사를 빛냈다. 속명 박한영(朴漢永)은 중앙불교 전문 교장을 지낸 뒤에 태고종의 교정을 지내기도 했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그의 좋은 글들이 문집으로 엮어지기도 하였던 석전 선사가 선운사 강맥의 마지막 줄기를 화려하게 맺었다고 볼 수 있다.

도솔산 낙조대(落照臺)
선운사로 들어가 길로 쉬엄쉬엄 낮은 구릉과 계곡길이 갑자기 우람한 산등성이를 옆으로 끼고서 그사이를 해 집고 돌아간다. 진흥왕설화는 도솔암으로 가는 길가에 진흥굴 앞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있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왕비 도솔과 공주 중애를 데리고 이 천연 동굴에서 수도 하였는데 어느 날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났다고 해서 이 굴을 열석굴이라 한다.

선운산의 뒷산 도솔산은 그렇게 절묘하고 괴이하다. 산의 높이는 해발 335미터이다. 도솔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국사봉 정상보다는 낙조대를 향한다. 거대한 암반들이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면서도 결코 오르기 험하지 않은 호방한 풍광이 사랑스럽다. 칠산 앞 바다 줄포만 위도가 장관으로 펼쳐지는 낙조대에서 석양과 노을은 우리나라 둘째로 아름다운 일몰을 연출한다.

칠송대와 암각여래상
선운사 중턱을 오르면 칠송대라는 암봉의 남쪽 벼랑에 거대한 여래상이 나온다. 40미터가 넘는 깎아지른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 암각은 그 위용이 장대하기 그지없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인 것이라 본다. 사적기에 고려 충숙왕 때 효정선사에 의해 선운사가 크게 중창됐다 하는데 바로 그때 제작을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다.
이 석각 여래상은 원만한 인간상이거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우람하고 도발적인 인상에 젊고 능력의 개성을 가졌다고 본다. 하대 신라의 지방호족들이 발원한 부처상에서 나타는 특징이다. 호족들의 자화상적 이미지의 반영되는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여래상 머리위에 닫집까지 지어진 흔적이 여래상 위쪽 구멍이 군데군데 나 있고 부러진 나무가 박혀 있는 것을 보더라도 닫집이 무너진 흔적이다. 기록에는 인조 26년(1468)에 붕괴된 것으로 본다.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여래상

복장 감실과 동학군의 비기
거대한 암각여래상의 빼꼽 부위에 네모난 서랍이 파여 있다. 부처님을 봉안할 때 복장하는 감실이다. 불경이나 불화 시주의 이름 등 조성내력이 기록된 문서가 들어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수많은 역사와 긴 세월의 흐름에 불교가 배척 받은 오랜 동안 감실의 내력을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기괴한 전설이 생겨나 바람처럼 번져갔다. 이 암각 여래상의 배꼽 속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다.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진다.

이른바 갑오농민혁명의 석불비결로 알려진 송기숙의『녹두장군』소설에 나오는 그 곳이 복장 감실이다. 또한 오지영의『동학사』에 실려 있다. 1820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서구가 민중들의 무슨 조짐을 보고 남쪽으로 내려가 무장현 선운사에 이르러 도솔암에 있는 석불의 배꼽을 때고 그 비결을 내어 보려는데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뇌성병력이 일어나 그 비결을 못보고 놀라 혼비백산 도로 봉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1892년 8월 동학의 3대 교주 중 가장 지식인이며 자금줄인 손화중 접장이 비결책을 꺼내 갔다. 시기적으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 반전의 일이다. 망해가는 나라의 썩은 담장에 일어서는 민중들의 힘과 의지가 서려 있는 얘기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서막을 장식한 위대한 전설로 헛된 논증할 필요치 않는 전설로 이어져 내려온 민초들의 희망이며 바람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민초들이 나라와 위정자 목민관들이 현실에 맞지 않는 탁상공론만 하면 그리했으랴 슬픈 비애감이 저 넓은 들녘에 지금도 함성이 타오르는 듯하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선운사를 돌아 나오며 불교의 이상향이 바로 이런 곳이구나. 선운사가 유명한 절인가 느끼게 한다. 선운사를 앞마당을 나오면 풍천장어가 천하일품 요리로 판소리 사설에도 나온다. 본래 장어는 바다와 연이은 강줄기에서 서식하는데 선운사 계곡이 흘러 바다로 빠지는 풍천이 최적지라는 것이다. 풍천장어는 여느 장어보다 싱싱하고 힘이 좋아 기어한 사람 스테미나가 넘치는 사람들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보식으로 이름이 높다.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이 제짝이다. 산딸기를 복분자라 부르게 된 것은 산딸기 술을 먹고 오줌을 누면 오줌독이 엎어진다고 해서 생긴 유래다.

선운사 동백장 여관
선운리 앞마을은 이제는 토박이들이 뿌리를 내려 살던 곳이 아니다. 외지의 관광객들이 뿌리고 간 돈에 사나운 인심만이 자리 잡아 간다. 선운사를 찾는 사람들은 의래 동백여관에 머무르며 추억의 밤을 세운다. 허물어 져 간 이층 양옥이지만 그 운치는 소박했다. 주인아줌마와 주방의 솜씨로 마음들이 따뜻했다. 동백여관이 동백호텔로 바꿔지면서 인심도 세월의 사업 확장에 따라 변해 버렸다. 시설은 편해졌지만 옛날 여관 시절 인심은 없고 계산속은 엷어가고 있다. 선운사를 마을을 빠져 나오며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같은 명시 한수를 내 놓을 수 없을 까 하는 시상을 떠 올린다. 올봄에는 유난히 비와 눈이 많이 내리며 황사에 동백꽃 노랗게 떨어진 선운사가 눈에 자꾸 아롱거린다.

젊은 남녀들이 즐긴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바람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동백꽃을 보신적이 있나요/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