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사적 제170호)

낙동강 상류에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산이 청량산이다. 퇴계 이황은 이 산의 12봉우리를 육육봉이라 했다. 높고 크지는 않아도 연이어 솟은 바위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어울려 예부터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산세가 수려하다. 청량산 12봉우리 한가운데 고혹적인 사찰이 들어 앉아 있다. 구름이 산문을 열고 닫는다는 청량사다.

마치 꽃 봉우리들이 꽃잎이 돼 청량사를 꽃술 삼아 한데 감싸 안고 있는 연꽃 형상이다. 연꽃을 닮은 자연을 선인들은 좋아 했다. 유리보전에 공민왕이 친필이 있고 법당에는 종이로 만든 지불인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인근의 불자들이나 사부 대중들이 무병장수와 병을 낳게 해달라는 치성도 대단했으리라 짐작이 간다.

신라의 명필 김생이 수도하며 서예의 기법을 익힌 곳이다. 청량사를 돌아 금탑봉 쪽으로 돌아 내려오는 길은 단풍 나들이의 일품이다. 봉우리 들 사이로 청량사가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시선을 떨군 풍경은 한 컷 한 컷이 그림이고 바로 예술이다. 농암 종택의 종손 이성원씨는 청량산 아래 경북 안동시의 도산 지역을 ‘한국 문화의 1번지’라고 자부한다고 말한다. 청량산 육육봉 보다 더 높고 큰 퇴계 이황의 유학의 정신적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땅이다.

중국 남송 때 주희는 무이산에서 주자학(성리학)을 완성했다. 성리학을 이어 받은 조선 시대 선비들은 주희가 머물렀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을 찾았고, 무이구곡가를 읊으며 주희를 흠모했다. 퇴계(退溪)는 이곳 도산에서 도산서원을 열고 후학들과 연구하면서 주희의 학문과 생활철학을 모범으로 삼았다. 퇴계는 낙동강을 따라가는 절경들을 보며〈도산구곡가〉원림이라 노래를 불렀다. 1곡은 운암이요 2곡은 월천, 3곡은 오담, 4곡은 분천, 5곡 탁영, 6곡 천사, 7곡 단사, 8곡 고산, 9곡 청량이다.

◇퇴계 이황과 명기 두향
조선시대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이황(1501-1570)과 관기 두향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한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철인의 사랑은 어땠을까. 충북 단양군 홈페이지 고을설화 란을 보면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을 때 기생 두향과 사랑을 나눈 얘기가 있다.

퇴계는 거문고와 난초 그림에 능한 두향을 묵객처럼 대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난 뒤 기적에서 빠진 두향은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선대 아래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다. 그러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두향은 “내가 죽거든 퇴계 이황 선생이 즐겨 찾던 강선대 아래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두향의 묘가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정신문화의 1번지
농암의 종손 이성원은 안동댐 때문에 도산 9곡 가운데 6곡이 물에 잠겼다며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지금 안동댐을 건설했더라면 지역민, 유림, 환경단체들로부터 동강댐의 몇 백배에 달하는 저항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안동시내에서 도산서원을 가기 전에 먼저 들린 곳은 퇴계의 제자인 월천이 후학을 기르기 위해 세운 월천 서당이다. 툇마루에 앉아서 서당 문 너머로 보이는 안동호가 한없이 고요하게 다가온다. 학동들이 저절로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인성 좋은 동량들이 양성되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유생들이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던 농운정사

도산서원은 퇴계 종택과 더불어 한국 유학의 정신적 상징의 1번지이다. 서원 문턱을 넘으면 농운정사, 하고직사, 도산서당, 동재, 서재를 거쳐 전교당에 이른다.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에는 한석봉의 글씨가 걸려 있고 넓은 강학당 마루엔 남·여 학동들이 예의범절과 한학을 익히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퇴계의 기념관과 유교적 학풍을 쭉 둘러보는 시간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윤리가 타락한 오늘날에 선조들의 정신적인 문화를 우리 스스로 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동댕이쳤기에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대학에서 조차 문학, 사학, 철학이라는 학문적 기본이 사라지며 심지어 정치학과가 없어져 버리고. 법대에 법학과, 행정과가 사라져 가는 실상이란다. 교육은 인간이 살아가며 지켜갈 중요한 가르침인 것이다.

◇퇴계 문하의 걸출한 두 인물
퇴계 선생의 수제자로 걸출한 두 인물이 있다. 서애 류성룡(1542-1607)과 학봉 김성일(1589-1593)이다. 조선 선조 때 학자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날린 두 사람은 퇴계의 문하생으로 모두 안동 출신이다. 퇴계는 학봉을 보고“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애를 보고는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이는 학봉이 4세가 위였고 생전 벼슬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경상도 관찰사) 보다 높았다. 살아 있을 때 나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1620년(광해군 12년)부터 이상하게 변했다. 퇴계를 모신 안동의 호계서원(당시 여강서원)에서 두 사람의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했는데 퇴계의 왼쪽인 상석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생긴 것이다.

학봉 집안은 나이순으로 서애 집안은 벼슬 순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자 당시 영남학파의 장로 정경세가 서애의 손을 들어 주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양쪽 집안의 다툼은 후대에까지 이어져 ‘병호시비’(屛虎是非.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의 시비)를 낳고 안동의 유림들이 두 파로 갈라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병호시비’는 양반가문 사이의 무의미한 체면 싸움만으로 볼 수는 없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퇴계의 학문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났던 남인은 병파와 호파로 갈라진 뒤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원과 향교에서 조직적, 학술적 역량을 축척해 갔는데 이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게 권오영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의 주장이다.

◇일제 항일 운동과 그 후손
대표적 양반 고장인 경북 안동은 조선말기 일제시대 항일 운동도 활발했던 곳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린 데 분격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안동에서도 의병이 봉기했다. 이때 의병대장이 퇴계 이황의 11대 손 이만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의 항일운동이 식을 줄 모르자 일제는 1907년 안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의 종택을 불질러 버렸다.

퇴계 종택

지금의 퇴계 종택은 퇴계 13대손 이충호가 1929년 인근 다른 집안의 종택을 사들여 옮겨 세운 것이다. 숙종 때 학자 권두경이 퇴계를 남달리 흠모해 세운 추월한수정도 재건됐다. 이제 퇴계 고택은 인근 도산서원, 계상서당. 퇴계묘소와 함께 명소가 됐다. 2001년 퇴계 탄신 500주년을 맞아 안동에서 세계유교 문화축제가 열렸을 때는 2000여명이 모여 추념제를 올렸다.

34칸의 퇴계 종택을 지키는 사람은 15대 손인 이동은(99)옹과 아들 근필(75)씨 뿐이었다. 이동은 옹의 부인과 며느리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살림살이도 바깥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쓸쓸하기까지 하던 퇴계고택은 서울에서 공부하던 손자 치억(32)씨가 결혼해 내려오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종부 이현주(31)씨가 아들을 순산하면서 4대가 함께 살게 됐다는 소식이다.

◇도산서원을 돌아 나오며…
퇴계 종택에서 나와 고갯길을 넘어 달리다 보면 퇴계의 14대 손이자 저항 시인인 이육사가 태어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도가 익는다/는 그의 고향이다. 마을 한쪽에 이육사 문학관이 조성돼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옛 시인을 뒤로하고 농암 종택으로 가는 길에 금빛 들판을 유유히 휘돌아 나가는 낙동강의 물돌이가 장관이다. 가송리에 있던 농암 종택은 원래 도산서원에서 1킬로미터 아래인 분천리에 있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종택의 유적과 유물들은 안동 시내 등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1996년 이성원씨가 이곳 도산 가송리 올미재 마을에 새로운 터를 잡아 종택과 서원들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종택 앞으로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은 강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보인다. 백사장이 있고 소가 있고 물 안에 눈부신 바위들이 솟구쳐 들어나 보이면서 오늘도 유유히 흘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