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 만해 마을

때 늦은 장마가 기승을 부리는 팔월. 조선일보가 주관한 ‘만해 마을 축제'에 가기위해 신문의 자료를 들춰 든다. 남녘땅에서 머나먼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 여정을 생각하니 여행길이 장난이 아니다. 정상기(전 교장, 목포대 장학실장) 광주 2대 시인협회장과 김경선 시낭송포럼 회장, 효사랑 병원 간호부장이 일행으로 동참하여 떠나기로 했다.

간소한 옷차림에 배낭을 들춰 메고 정 회장의 승용차에 몸을 싣는다. 구름이 잔뜩 낀 여름하늘을 머리에 이고 떠나는 먼 여정 길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아득하기만 하다. 장성 갈재 터널을 넘어 정읍을 지나치니 전주 톨게이트 도로가에 동학농민운동의 기념탑이 눈앞에 다가온다. 문득 한 겨울 매서운 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들었을 민초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 해 마음이 착잡해진다.

드넓은 김제 만경의 벌판에선 황산벌을 달리는 계백장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삼례왕궁에선 삼국통일을 위해 영웅들과 자웅을 겨뤘던 견훤의 일갈이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우리 조상들이 써 내려 갔던 옛 역사들이 시종일관 말을 걸어와 먼 여정 길을 지치지 않게 해주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남긴 발자취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도로 공사로 어수선하고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백담사 입구 용대 마을에 도착 했다.

어느새 어스름 해가 지는 초저녁이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찾은 식당엔 승주 석곡사람인 주인아주머니가 일행을 반갑게 맞아 준다. 다행이도 전라도 아주머니의 음식솜씨로 이 지방에서 유명한 황태찜을 먹게 됐다. 맛이 괜찮은 편이다. 여행은 뭐니 뭐니 해도 그 지역의 특산 식을 맛보는 게 제 맛이다.

요기를 마친 일행은 내일의 여정을 위해 새로 지은 듯한 마을 2층집에 여장을 풀고 고단한 몸을 눕힌다. 산골이라 그런지 한 여름인데도 무척이나 시원하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는 귀를 간지럽힌다. 다음날 아침 석곡 아줌마 식당에서 시원한 황태국을 먹고 백담사 가는 버스를 기다리자 어디서들 오는지 관광차량과 승용차들이 도로를 꽉 메운다.

전국에서 버스들이 오면서 조용한 아침은 시끌 벅적이다. 버스는 인원이 가득차자 바로 출발을 한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길은 연신 구불탕 거리고 그 물 맑고 좋던 계곡은 강수량이 부족한 탓에 뼈가 드러난 듯 흰 돌무지 무더기로 하얗게 드러누워 있다. 그렇게 약 8킬로를 더 깊숙이 계곡을 찾아 들어가자 백담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백담사 전경

백담사는 서기 647년 신라 제 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 삼존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1783년(정조 7년)에 최봉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가 1905년 이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고, <조선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1988년 전통사찰 제24호로 지정된 백담사는 현재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등 6개 동의 기존 건물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만해 기념관, 만해 교육관, 만해 연구관, 만해 수련원 등의 16개의 건물로 구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의 하나이다.

특히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은 영조 24년(1748)에 조성된 아미타불 좌상으로 18세기 전반기의 불상 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기초선원으로 지정되어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근래 들어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은거지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계곡을 건너며 만해 기념관으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다. 이곳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집필한 만해 선사는 한국문학의 대표적 시인이자 불교의 대선사이다. 민족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암흑시대 겨레의 가슴에 민족의 혼을 불어 넣어 준 만해선사의 문학성, 자유사상, 민족사상은 오늘날까지 민족정신의 원형으로 남아있다.

만해 선사가 남긴 “인생은 눈과 서리 같다”, “인생유수”란 붓글씨 앞에서 발걸음이 서성거린다. 동창인 화순 이양 용화사 주지 스님이 자유 수호단체가 주최한 군민회관 행사장에서 만해 선사의 ‘님의 침묵'을 낭송하였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용화사 진환 스님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에 “인생유수”라고 적힌 액자를 하나 사자 일행들은 좋은 우정이라며 부러워들 한다. 만해선사의 기념관을 돌아 나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칩거시절 방을 본다. “화무는 십일홍” “권불 십년”이라. 인생무상 제행무상 인생은 한낱 바람 같은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백담사 경내 연못에서…

백담사를 다시 돌아 나오며 이제 우리들이 몇 번이나 이곳에 와보게 될런지…. 아쉬운 마음이 절로 든다. 차는 다시 역행을 하여 만해 마을로 나간다. 도로확장 공사로 인해 도로사정이 엄청 불편하다.

‘만해 마을 축제'로 분주한 마을에 도착하자 날씨는 잔득 흐려져 비가 한 두 방울 내린다. 여기 저기 걸려 있는 현수막들에는 ‘오늘의 만해대상'을 받을 사람들의 이력과 한국의 유명 시인들의 시가 걸려 있다. 시상식에 대학시절 나의 교양과목을 담당했던 김용직 교수가 대상을 받는다. 고교시절 친구이자 시인인 허형만 목포대 교수가 상임부위원장으로 참석한다기에 기쁜 마음이 더하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자 정상기 교장은 갈 길이 멀다며 자꾸만 재촉한다. 조금 있으면 행사를 시작할 터인데 말이다. 하늘같은 선배의 말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지만 대학시절 존경했던 은사님의 수상을 축하해 주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길이 마냥 무겁기만 하다. 노천명 시인의 「푸른 오월」이란 시를 흙 판에 적어 놓고 강의를 하던 은사님이 나의 청년시절 추억과 맞물려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일행과 함께 둘러본 만해 마을은 만해 문학박물관, 문인의 집, 만해학교, 심우장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문학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로, 문학 강연과 학술제로 인해 마치 여느 캠퍼스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건물의 디자인이 아름다워서 소박한 산책을 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을 기린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많다. 남한산성과 백담사에 만해 기념관이 있고 만해 마을에는 만해 문학박물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33년 선사가 서울 성북동에 지은 심우장(尋牛莊)도 기념관 역할을 한다.

생가지인 홍성에는 얼마 전에 시비공원을 조성하고 또 체험관까지 문을 열어 문학관이나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홍성문화원에서는 만해 선사의 독립 정신과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매년 만해제(萬海祭)를 개최하고 있다.

현재 만해생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어 있고 1991년부터 선사의 생가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사적화하기 위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생가인 초가 외에 시비공원을 조성하여 민족 시인들의 시비가 야산에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체험관을 건립해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만해의 삶과 예술세계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