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운(46) 작가

하늘의 구름을 유화로 그리다가 어느덧 모래사장 물결을 한지로 떠내고, 최근에는 마른 꽃잎과 넝쿨 줄기로 상상력을 풀어내는 작가 강운. 구름을 그리는 화가로 더 유명한 작가는 과거의 틀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 채 변신을 갈망하며 새로움에 대한 도전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30대 초반인 13년 전 화순 동복 들판의 허름한 창고를 빌려 작품활동을 한것이 인연이돼 지금까지 화순에 몸을 담고 있는 그는 배고픔의 시절을 함께했던 화순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작가는 가장 힘든 시기에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었던 동복의 작업실을 두고 세상에 등을 돌린 채 칩거한다는 의미로 ‘토굴’이라 부르며 분신처럼 아끼고 있다.

배고픔은 지겹도록 나를 따라 다녔다
강진 출생으로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때부터 광주생활을 시작한 작가는 90년 전남대 미대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지만 이후의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순애보 같은 연애를 통해 시작한 결혼생활은 그에게 반짝 황금기를 가져다 주었지만 자신만의 세상을 그리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열망은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신혼의 아내를 뒤로한 채 해남으로 내려간 그는 그곳에서 인위적인 힘과는 상관없는 자연이 그리는 순수한 형태들을 화폭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자연에 스며들어 창작에 몰두한 2년 간의 해남생활은 훗날 그를 구름작가로 유명해지게 하는 기반을 닦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뜻밖에 일어난 화재는 그의 모든 것을 앗아 갔다.

이후 담양에서 2년동안 붓을 잡고 재기를 노렸지만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그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광주에 미술학원을 차렸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1년도 채 안되 쫄딱 망해서 두손 두발 다 들고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해남이나 담양, 광주시절은 비온 뒤 진창을 걷는 것처럼 절망적인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둘째를 임신한 만삭이 다된 아내가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면 어떻게 살까 걱정을 하며 힘들어 하곤 했는데 남편으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많이 미안했습니다. ”

97년作 ‘두 사람’.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아내가 식구 하나 더 늘어나면 어쩌나 걱정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그렸다. 97년 그린 이후 밀봉해둔 채 한번도 꺼낸적 없는 그림을 내보이며 웃어 보이는 작가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뱃속의 태아까지 포함해서 제목이 ‘두사람’인 이 작품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작가의 압박감이 담겨있다.

세상이 날리는 잔 주먹에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겸 나왔다가 우연히 동복에 들리게 됐는데 왠지 모를 끌림 같은게 있었습니다. 그길로 동복 농협에 들어가 여기 토박이가 누구냐고 묻고는 그분한테 50만원 짜리 창고하나만 구해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당시 내손엔 70만원이 전부였는데 20만원은 이사비용으로 남겨 둬야 했기 때문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떠밀려 호기를 부렸다며 반신반의 했지만 뜻밖에도 농협측에서 며칠 후 적당한 곳을 찾았다며 연락이 왔다. 그렇게 시작된 동복 작업실과의 인연은 겉으로는 그에게 세상에 등을 돌리고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가져다 주었지만 또한 훗날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반격의 힘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생활의 잽에 맞아 넉다운되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고 내 안에 그릴 힘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딱 2년만 그려보고 답이 안보이면 접을 생각으로 밤낮없이 그림에 매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동복 작업실에서의 초기 생활은 그야말로 무료함의 연속이었다. 그럴때 마다 그는 연애질 할 대상을 찾았고 그 대상은 하늘이었다. 시간, 빛, 공간이 모두 하늘속에 담겨 있었고 동틀녘이나 해질녘의 하늘은 마음속의 운율을 만들어 주었다. 작가는 그 느낌을 놓치지 않고 캔버스에 옮기며 하늘에 말을 걸고 자연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갔다.

기회는 바람처럼 다가왔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내기를 1년. 세상을 잊고, 자신을 버린 채 하늘에 담긴 구름을 화폭에 담아 가던 그에게 그렇게도 꿈꾸던 기회가 찾아 왔다. 서울소재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한번 전시해보자는 권유가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열린 97년 서울 포스코 미술관 2인전과 98년 서울 성곡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구름화가 강운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2000년 광주비엔날레, 2005년 일본의 모리 미술관 전시 등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알릴 기회 또한 생겼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의 작품을 소장 할려는 움직임도 일어나 생활로부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었다. 미술관에서 개인으로, 원하는 층이 점점 넓어져 갔고 농사철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처럼 부지런히 그리고 그림 좀 된다 싶으면 서울로 가져가 전시하며 최소 생계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다.

올해에는 프라하 비엔날레 한국측 큐레이터 이원일(48) 씨가 뽑은 국내 작가 10인 중 한명으로 선정돼 제4회 체코 프라하 비엔날레(5월14일∼7월26일)에 작품을 출품하는등 세계적으로도 역량을 과시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97년作 ‘하늘天 땅地’. 194 x 252cm / Oil on canvas

변화 그리고 에필로그
강운 작가는 초기에는 구름을 주로 그리다가 몇 년 전부터는 해변의 움직임을 한지부조로 떠내거나 젖은 한지위에 나무결을 찍어내는 등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하늘에 담긴 구름을 동양의 일획사상과 접목해 추상적으로 그린 '일획(一劃)'이나 나뭇가지와 꽃잎을 통해 자연에서의 합일점을 찾는 '유어공(游於空)'은 현재 체코 프라하 비엔날레 전시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해외 전시가 끝나는 대로 국내에도 작품을 선보여 변화되고 있는 자신의 세계를 선보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구름 페인팅에 언제까지나 갇혀 있기는 싫었습니다. 구름 작품이 잘 팔리기는 하지만 팔리는 작품만 하면 그것은 작가의 직무유기라고 봅니다. 창작하는 자는 실패할 권리가 있다는 말처럼 새로운 작업을 안하는 작가는 죽은것과 같습니다.”

그는 최근 13년간 동고동락했던 동복의 작업실에서 나와 광주 계림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와 작품활동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연애 대상을 찾게 해주고 작가 자신을 발견하게 해준 동복 작업실 ‘토굴’을 버릴 수는 없어 일획과 유어공 작업은 새 작업실의 지하와 4층에서, 구름 그림은 동복에서 나눠 하고 있다.

“누군가 저에게 ‘아직도 걸작을 꿈꾸는가’라고 묻는 다면 그렇다고 말할겁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은 게 꿈이니까요. 내 마음속에 두근거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때면 연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런 기분은 두근거림을 가져다 주고 그 두근거림은 게으름을 피우며 뒹굴다가도 몇날 몇일을 날을 새우는 것도 가능하게 만든다. 구름처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갈망하고 있는 작가 강운. 그는 지금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끊임없는 욕구에 귀를 기울이며 치열하게 붓을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