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화가 박선주.

몇 주 전 다른 작가의 작업실에서 박선주 작가의 판화와 맞닥트렸다. 도저히 판화일 것 같지 않은 가느다란 선으로 이루어진 섬세함이 기가 막혔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바라보는 판화 안 세상에는 작가가 눈물을 온통 뒤집어쓰고 ‘살고 싶다’고 ‘제발 살려 달라’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매주 월요일. 작가는 자신이 거주하는 순천을 뒤로하고 이곳 광주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하루를 보낸다. 레이스 커튼이 곳곳이 설치되어 세상과 단절된 작업실은 온전한 그만의 공간이다. 살아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천연산소로 채워진 삶의 충전소이다.


바닥은 미끄러울 정도로 청결하고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짐이 없다. 판화 안에서 보여주는 세상처럼 숨 막히도록 치열하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앞만을 보고 달려야 한다고 주문을 걸었던, 눈물 나는 수많은 시간들이 천장 높은 작업실 안을 부유한다.

▲ 판화가 박선주 作 「정글」

중독 - 다시 판화와의 조우


그가 살아가는 세상은 ‘정글’이다. 먹고, 마시고, 웃고, 즐기며 살아가는 세상. 신체적인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다시 사회 속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삶 역시 ‘정글’로 인식한다. 그만큼 정글은 치열하다.

▲ 판화가 박선주 作 「휴식」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다. 웃음을 짓기 위해 그만큼의 눈물이 필요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그 두 배의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심연과 침잠의 깊이로 정글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은 그만큼의 속도로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고통의 통증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작가는 스스로 인식하고 서둘러 일어선다.


무릎의 생채기를 스스로 털어내며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서서 하늘을 보며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 간다. 생활에서 만나는 정글이 아닌 동판 위에서 만나는 한 번은 걸러진 농밀한 정글의 세계다.


현실의 정글을 떠나 자신만의 정글에 안착한 작가는 무표정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비웃음으로 향했던 눈빛도 순해졌다. 다시 정글 안 생물체들은 새로운 정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막연했던 형상들이 딱딱하고 온전하게 굳어져 내게 다가온 것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살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했다. 아니 꽂혔다는 말이 더 합당하다”


판화는, 다시 말하면 작업은 그에게 있어 삶의 목숨 줄이다. 줄을 놓는 순간 박선주는 순식간에 이 지구상 안에서 공기방울로 사라져버린다.


고통의 정글이 사유의 정글로 순간이동하다

▲ 판화가 박선주 作 「휴식」

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시인 정호승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시에서 말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고통을 십자가처럼 지고 살아간다.


아무도 덜어 줄 수 없는, 대신 져줄 수도 없는,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자신이 져야할 삶의 무게다. 가볍다거나 다른 이들보다 더 무겁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통은 쏟아내는 눈물과 회한의 양만큼 더 깊어지는 성찰을 선물해주고 고통을 알지 못하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사유의 깊이까지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의 판화 안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담겨있다. <정글 - 2008년 작>에는 작가의 모든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꽃들과 갖가지 이파리, 수리부엉이, 잠자리, 벌, 안경원숭이까지 자신을 둘러 싼 모든 생활들을 은유로 보여준다.


자신을 드러낼까말까를 망설이는 여자는 판화 안에서 무표정한 속 옷 차림으로 비스듬히 세상을 엿본다. 보기에도 여자는 매우 화려해 보인다. 어떻게 이 정글을 뚫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정글>의 다른 시리즈에서는 온통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린다. 아직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대해 결정을 못 내리고 준비가 덜 되었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글 속 생물들이 오히려 생명줄을 탐낸다. 아예 자아는 사라져버려 여자는 보이지도 않는다. 더 꽁꽁 숨어버리고, 부양할 생물체들은 더 확연한 모습으로 실체로 내보인다. 부엉이, 고양이, 독수리, 생쥐, 도마뱀 등 야행성 생물들은 살아 움직이며 발을 내밀어보인다.


하지만 희망은 아직 있다. 모습을 감춘 여자는 뾰족한 정글의 위험지대에 색깔고운 앵무새와 나비, 부드러운 잠자리와 갖가지 꽃들을 피워내려 드러나지 않은 채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 판화가 박선주 作 「UTOPIA-어항」

다시 세상을 향해 날아가다

▲ 판화가 박선주 作 「UTOPIA-비너스」

작가는 다시 자신을 추스르고 길을 나선다. <정글 - 2008년 작>시리즈에서 보여주는 간절함이다. 무엇인가 내면의 결정을 한 듯한 여자는 동판 위에서 자신의 나신을 보여준다.


머리에는 환히 피어있는 꽃을 장식하고 번민과 고통을 동반하던 야행성 생물체는 부엉이 밖에 없다. 그것도 모두 공간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눈빛도 순화되어 지상을 향한다. 여자는 자신을 옥죄고 있던 운명의 실타래를 거의 다 풀었고 풀어 내린 엉켜진 실타래 중 한 줄만을 몸 위에 장식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 뾰족하기만 해 자아마저 숨어있던 금속성 짙은 억눌림과 숙주가 필요했던 곤충들은 더 작아진 채로 멀리 밀려나 있다. 여자가 앉아 있는 곳에서는 보다 더 크고 화려한 꽃이 뭉텅이로 피어나고 여자의 자궁 안에서는 한 마리 새가 앉았다.


언제 날아오를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자가 바라보는 눈빛방향과 새는 서로 다른 곳이다. 손에는 아직도 차마 놓지 못하는 삶의 정글이 아직도 한 움큼이다.


세상을 향한 욕심도 애욕도 화려함까지도 모두 놓아버린다. 다 놓아버린 후 얻은 것은 자아(自我)다. 자신을 더 깊이 사랑하고 끝도 모를 깊이로 스스로 내려가 비로소 찾아 낸 보석 같은 눈물의 자아와 만난다. 이제는 살 것 같다. 하늘을 향해 비로소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서 소리 지른다. 작가는 그림 안에서 말한다. 이제 망설임은 끝났어. 지금은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야.

문의 : 017-633-6864

▲ 판화가 박선주 作 「정글」

에필로그


날 저문 산기슭을 홀로 걸으며 알게 된다. 새와 풀벌레의 울음에 잠긴 외로움을, 갖가지 나무와 풀들과 사람에게 묶여진 그 끈의, 인연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왜 서로에게 너그러워야 하는 지를. 보다 화려하게, 보다 멀리 성급히 날다 길 잃은, 이제야 멈추어 둘러보는 젊은 날의 날개가 보인다.


살아가면서 정말 많이 아픈 것은 마음 안에서 강을 건너는 일이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강을 건너는 일이다.


머릿결 바람에 날리는 분수를 닮고 싶다. 분수는 언제나 한 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 버린다. 부서지는 것이 곧 삶의 전부다. 누군가 귀에 대고 울림으로 느끼게 한다. 네가 웃고 있구나. 나도 웃는다. 네가 울고 있구나. 나도 울고 있다.




범현이baram@simi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