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헌(雪軒) 나창호(羅昌浩 65) 선생

종이와 붓과 먹, 그리고 인내… 글 한자 한자에 혼을 담아 예술의 꽃을 피운 설헌 나창호 선생. 일전에 다른 일로 그의 서실을 찾았을 때의 강렬한 느낌은 오래도록 지울 수 없었다. 당시 받았던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를 찾아 나서게 했다.

뉴욕빌딩엔 묵향이 가득하다
뉴욕빌딩이라고 해서 미국 뉴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화순우체국 뒤편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먹자골목 중간에 나창호 선생의 설헌서예원을 품고 있는 조그만 건물을 말한다. 뉴욕과 서예. 부조화인듯 하면서도 느껴지는 야릇한 조화. 후학양성을 위해 3층에 둥지를 튼 서예원에 들어서자 은은한 묵향이 밀려든다. 묵과 종이의 향이 어우러져 다가오는 강렬한 느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점점 더해진다.

작품을 쓰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낯선 방문객을 반갑게 맞는 노신사. 악수를 하며 잡은 손이 힘 있게 느껴지는 건 필력으로 다져진 선생의 경륜 때문일까. 그의 30년 붓글씨 인생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

붓을 드는 건 생업보다 더 중요했다
설헌(雪軒) 나창호(羅昌浩) 선생.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 살에 결혼을 하고 교육청 임시직으로 생업을 이어가던 그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서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서당선생님으로부터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혼 무렵 송곡 안규동 선생 문하로 입문해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게 되었다.

“단칸셋방살이를 하면서 서예를 한다는 것이 많은 애로가 있었네. 그래도 피가 원래 그래서인지 꿈을 접을 수는 없더구먼.”

덕자사업지기(35*130). 예서체.

그는 임시직 박봉으로는 먹고 살기도 빠듯해 사사(師事)비와 지필묵비를 충당하기조차 어려웠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스승이었던 송곡 선생의 권유로 작가들이 작품에 낙관을 할 때 쓰던 전각(篆刻)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경제적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스승님의 가르침과 배려가 없었다면 포기했어도 아마 수백 번은 했을 거네. 그분이 타계하신지 벌써 20여년이 지났지…”

그러나 만만치 않았던 예술의 길…
생업과 서예의 길을 모두 걷고자함 때문이었을까. 그 후 필진회 선배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공부에 매진했지만 94년 광주미술대전 초대작가가 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방작가로는 성이 차질 않아 전국 규모의 국전에 수차례 도전했지만 매번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한동안 방황을 많이 했었지. 요새말로하면 아마 슬럼프에 빠졌다고 보는 게 맞을 거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지.”

결국 금초 정광주 선생의 주선으로 서울에서 활동 하던 강포 김상용 선생으로부터 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직장에 근무하며 일주일에 한번 씩 새벽 첫차를 타고 상경해 해서(楷書) 중에서도 웅장한 육조(六朝)를 지도 받기 3년. 그러나 경제적시간적 여건이 더 이상 허락 칠 않아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시기에 날이 제대로 섰던 모양이야. 서울 공부 시작한 첫해부터 시작해 내리 3년을 국전에 입선했으니까. 계속 공부했으면 더 좋은 결과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네.”

설헌서예원을 차리면서 붓글씨 인생의 꽃을 피웠다
IMF여파로 57세에 정년퇴임 후 차린 설헌서예원은 그에게 있어 큰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마음껏 못했던 서예공부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막에 쌓인 서실에서 모든 걸 잊고 붓과 씨름하다보니 새삼 글 쓰는 즐거움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시간과 날짜도 잊고 심지어는 쓸쓸함마저 잊으며 하루에도 수백 장씩 써나가는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참 무진장이도 썼었네. 내가 글씨인지 글씨가 나인지 모르겠더구먼. 그 덕에 국전초대작가가 되긴 했지만…”

인자무적(35*70). 전서체.

나창호 선생은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여덟 번의 입·특선으로 초대작가 반열에 올라 그동안 품었던 목표를 이루어냈다.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힘이 되어준 학정 이돈흥 선생을 비롯해 필진회 선배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울러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삼남매를 훌륭히 키워준 아내 배순자 여사에게도 고마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화순의 지킴이로 남고 싶다
그는 탯 자리인 화순에서 후학양성을 하며 서예를 알리고 가르치는 지킴이로 여생을 바치고 싶다고 말한다. 기존 모임인 화묵회(和墨會)를 활성화해 서예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망설이고 있는 이들의 부담을 덜어줘 서예입문의 폭을 넓히는 것도 목표이다.

“붓을 들어 글씨를 쓴다는 건 마음을 다스리는 수련이라고 보면 맞을 거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어렵고 지루하다고 다들 안 할려고만 들지.”

선생은 컴퓨터니, 향락위주의 취미생활에 물들어 서예를 점점 멀리하는 세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제대로 된 전시 공간 하나 없는 화순의 현실을 보며 예술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도 어려움 중에 하나였다.

프롤로그
글자의 선과 획을 이용해 미학적 정서를 보여주는 조형예술 서예. 예술은 끝이 없으며,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인고를 견뎌내고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숱한 스토리를 누가 짐작이나 할까. 아직도 한없는 부족함을 느낀다는 그의 말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붓글씨 하나로 일가를 이룬 대가는 먼 곳이 아닌 지척에서 우리와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나창호 선생이 직접 만든 전각(篆刻). 형편이 어려울때 전각을 팔아 서예를 계속할 수 있었다.

후학들의 연습 작품들

설헌서예원

왼쪽부터 화명, 김삿갓 시, 김인후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