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인 선영숙 씨

이서면 야사리 갑동 마을에 위치한 호남연정국악원에 가면 우리의 전통 가락을 지키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있는 선영숙(55) 씨를 만날 수 있다. 선영숙 씨는 현재 초대 한국예총 화순지부장과 국악인협회 화순지부장, 호남연정국악원의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이런 저런 직함은 다 던져두고 반백년 가야금 사랑에 열정을 다한 국악인으로서 먼저 가슴에 와 닿는 건 한복 자락과 어루러진 가야금 소리가 천하일품 이어서는 아닐까.

국악인 선영숙 씨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의외로 가까웠다. 화순읍을 출발, 안양산 휴양림의 내리막길을 달리다 좌회전해 왼편으로 보이는 안심제를 보며 잠시 넋을 놓고 있을라치면 민박집 ‘산적소굴’로 유명세를 탄 안심마을이 코앞에 다가온다.

200m정도 더 가다 보면 보월과 이서면소재지로 가는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달리면 차 반잔 마실 시간이 흐를 즈음 야사리 갑동 마을 입구에 ‘호남연정국악원’이라는 푯말이 나온다.

경주하듯 달리는 습관은 잠시 접어 두고 좌우로 펼쳐지는 산수풍광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드라이브하며 가도 승용차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마을 초입부터 가야금과 장구가 어우러져 서로 밀고 당기는 가락이 낯선 이의 방문을 정겹게 반겨준다.

1층은 연습실, 2층은 합숙실로 쓰고, 장구·가야금·아쟁 등의 전통악기를 가르치는 연정국악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자들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맞아주며 선영숙씨에게 안내한다. “워메 식사는 하셨소. 안했으면 김치에 밥이라도 같이 먹읍시다”며 편하게 건네는 인사말이 소박하게 느껴진다.

선 씨는 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가야금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선 씨 집을 자주 왕래하던 큰 고모부인 무형문화재 고(故) 임동선 선생의 가야금 타는 모습과 단아한 가야금 소리에 매료되면서 부터다. “아버님이 굉장히 엄해 처음엔 제가 가야금 배우는 것을 반대하셨어요. 그런데 그 어린나이에도 한 이란 게 있었는지 가야금을 타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재미에 빠져들어 결국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과거를 회상하는 선 씨의 눈엔 뜻 모를 물기가 사르르 번진다. “형편상 거의 독학으로 배우다시피하며 하나씩 배워가던 옛날을 생각헌게 좀 그러요”라며 조용히 웃는 모습에서 국악인의 길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님이 느껴졌다.

선 씨는 초등학교 때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 지금까지도 걷기가 불편하지만 오직 가야금을 타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념으로 평생을 지내오고 있다.

적벽 망향정에서…

가야금 타는 솜씨도 일품이어서 가야금 6개 유파 중 4개 유파를 통달할 정도라고 한다. 보통 가야금 연주자의 경우 1-2개 유파를 섭렵하는 것에 비하면 ‘실력가’로 평가 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엔 화순의 국악인협회·문인협회·연예예술인협회 등 3개단체가 모여 창립한 ‘한국예총 화순군지부’의 초대지부장을 맡아 탄탄한 역량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 제자들을 보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요”라고 은근히 제자 많음을 자랑하는 선 씨는 1970년대 광주시립국악원(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전신)에서 활동하다 전남대학교 국악과 1기부터(1982) 27년 동안 제자들을 길러내 그 수만 천여 명이 넘는다. 옛 전남도청 부근 국악원에서 가르치다 2001년 이서면 야사리에 호남연정국악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둥지를 틀었다.

문을 열 당시만해도 주민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며 껄끄럽게 대했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인것은 마을 분들이 지금은 문을 열고 한마음 된것이죠”라며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고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소회했다.

“여기서 처음 시작할 때는 큰 뜻을 품고 시작 했는디 참 힘든 일이 많습디다. 제자들 가르치고 사람들한테 국악이 뭔지 알리고 다니는 것이 내 헐일 이라고 생각 허는디 이것이 희생 없이는 못하는 일입디다.” 그래도 처음 화순에 왔을 때는 예향치고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는데 여기까지 왔다는 게 즐겁다며 많은 사람들이 국악이 뭔지, 예술이 뭔지 알게 돼서 보람된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이렇게 된 데는 남편 신상철(60) 씨의 도움이 컸다. 전 전남도립국악단에서 6년 동안 상임 지휘자로 있다 물러 난 신 씨는 현재 한국연예총연합회(총이사장 김덕수) 전남지회장을 맡고 으며, ‘구례향제줄풍류(가야금, 거문고 등 줄로 된 악기로 연주하는 형태)’ 전수 조교로 10여년 동안 활동해 오고 있다.

30일 목포MBC ‘남도에 살고 싶네’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선영숙 씨

특히 선 씨는 이서면 야사리가 농림수산식품부가 선정한 올해 농촌마을 종합개발 사업지로 선정된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그 동안 명맥만 유지해 오던 국악체험장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부지를 확보하는 등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이서면 야사리가 ‘생명과 문화가 어울리는 누에마을’로 개발되는데, 그 여파로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손수 가야금도 타게 해보고 장구도 쳐보는 등 우리 국악을 있는 그대로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겠다는 포부에서다.

“백 마디 말보다 장구채 들고 직접 두들겨 봐야 국악이 뭔지를 알고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요. 앞으로는 화순이 ‘화순풍류문화축제’라는 명칭대로 문화예술이 발전해 나가리라 봐요.” “그리고 올해는 미술·무용·사진협회를 끌어안아 걸음마 단계인 화순예총의 기반을 탄탄하게 해놓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다음 대가 더 편안히 나갈 수 있지 않겠어요”라며 초대 예총화순지부장으로서 많은 책임을 느끼고 있음을 내비췄다.

조용한 갑동 마을에 은은히 퍼지는 우리네 가락 소리를 뒤로하고 돌아서는 귓가에 국악인 선영숙 씨의 말이 자꾸만 맴돈다.

“화순엔 내노라 하는 예술인들이 참 많은디 제대로 된 공연장 하나 없는 게 아쉬워요.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 있는 재주 맘껏 펼치고 함께 즐거워 한다면 원 없것는디….” “참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요.”

아니나, 신명나게 굿판 한번 벌이고 어깨춤 들썩이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반복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상을 맛보고 싶어 하고 거기에서 내일을 살아가는 힘을 얻곤 한다. 잘 놀고 맘껏 웃는 것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서면 야사리 갑동 마을에 자리한 호남연정국악원

선영숙 씨가 제자들에게 가야금을 전수 해주고 있다.

신상철(60) 전 전남도립국악단 상임 지휘자가 아쟁을 연주하고 있다.(선영숙 씨와 부부 국악인으로 유명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