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17세 (7)

조광조 평전
1498년 17세 (7)
  • 입력 : 2021. 03.23(화) 10:59
  • 화순군민신문
학문에 미친 광자狂者

스승의 죽음을 전해 듣던 해, 조광조는 스물셋이 되었다. 그사이 열여덟 살에 혼인을 했고, 열아홉 살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복服을 입었다. 지아비가 되고 삼년상을 치러냈으니 진짜 어른이 된 것이다. 그동안 그는 다른 스승을 구하지 않고 홀로 학문에 정진했다. 그럴 만한 스승을 찾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문을 격려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집권자들 입장에서 보자면 두 차례의 사화로 일단 생각 있는 자들을 ‘입 다물게’ 하는 데 성공했다. 모여서 도를 가르치고 배우는 분위기가 꺾인 데다가 실제로 공부 좀 한다하는 이들이 사라져버린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독재자가 원하던 모습이다.

조광조는 출사하기 전이었다. 이미 십 대 시절부터 과거를 권하는 이는 많았으나 아직 문장을 익히지 못했다는 말로 거절했다고 전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유배지의 스승이 기어이 참형을 당하자 마음은 더 가라앉았을 것이다. 갈등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세상으로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수기修己에 전념해야 하는지. 일단 학문 속에서 어두운 시절을 견디기로 했다. 과거에 뜻이 없다 해서 공부를 그만둘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험공부는 그저 벼슬이나 명예 같은 사욕에 매이기 십상이니까.

문제는 이런 조광조를 비껴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 공부의 뜻이 무엇이냐고. 이 무렵 그에게 ‘광자’라는 말이 붙여지기 시작한다. 미친 사람처럼 공부에 몰두했다는 말인데, 그런데 이것이 거리낄 만한 일이었을까.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그것이 ‘진짜’ 공부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광자와 한 조를 이룬 듯 따라다니던 ‘화태禍胎’라는 표현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그 공부가 화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그대의 스승을 돌아보라는 뜻이겠다. 이를 꺼려 사이가 멀어진 친지와 친구들도 있을 정도였으나 조광조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짐작대로다. 무언가에 미친 사람이 고작 남의 말에 흔들려 정신을 차릴 리 없다.

그렇게 다시 두 해가 지난 병인년(1506년) 9월. 연산군의 폭정이 다할 대로 다한 이해, 마침내 세상이 바뀌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난 것이다. 조광조의 나이 스물다섯, 미친 듯이 공부한다는 그의 이름이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가던 때였다. 어디까지 퍼져나갔을까. 당시 전라남도 능성에 살던 열아홉 살의 양팽손梁彭孫이 조광조의 이름을 듣고 찾아왔다는 일화를 보면, 식자들 사이의 소문은 생각보다 빠르고 상세했던 것 같다. 조광조의 본가는 한양으로, 그는 당시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에 거하던 중이었다. 남도에서 한양 부근까지 광자를 찾아와 배움을 청한 양팽손 또한 그다지 평범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역시나 이 두 사람에게는 남다른 인연이 기다리고 있다.)
화순군민신문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