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17세 (6)

조광조 평전
1498년 17세 (6)
  • 입력 : 2021. 03.15(월) 10:23
  • 화순군민신문
도란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 마시는 것에 있는데 道在冬裘夏飮氷

날이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하겠습니까. 霽行潦止豈全能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마는 것이니 蘭如從俗終當變

소는 밭 갈고 말은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誰信牛耕馬可乘


요직에 오른 김종직이 강직한 정론을 이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이제 그런 스승의 가르침을 어찌 따를 수 있겠느냐는 어조까지 담고 있다. 제자의 시구라기엔 몹시도 따끔해서 김종직 입장에서는 마음에 상처로 남을 법한 내용이다. 사실이 그랬다. 자신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답시를 보낸 것이다.

분수 넘치는 벼슬 이어져 얼음을 깰 정도 되었으나 分外官職到伐氷

임금 바르게 하고 풍속 고치는 일 내 어찌할 수 있으리. 匡君捄俗我可能

가르침 따르는 후배는 나의 못남을 조롱하지만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해에 구차하게 편승하지는 않으리니. 勢利區區不足乘



김종직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고, 그래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있다. 서로에게 서운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이미 마음이 상해버린 두 사람이었다. 김굉필은 자신에게 가르친 학문대로 끝까지 살지 못하는─것으로 보이는─스승과 화해하지 못했다. 둘의 관계는 사실상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한 채 옛 사제지간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김굉필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을 대하는 스승으로서의 그는 오히려 다정하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참이나 어린 제자인 조광조와의 일화는 물론, 전해지는 몇몇 이야기에 등장하는 김굉필은 까다로운 비판자라기보다는 고요한 수행자에 가까워 보인다. 문장에 능하여 수많은 시문을 남긴 김종직과는 달리 남긴 작품도 많지 않다. 그렇다고 이른바 학술서 집필에 전념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김굉필이 살았던 연산군 시절의 조선 성리학은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격렬한 반론이 이어지는 수준까지 진행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굉필 자신이 학문을 대하는 태도도 그랬다. 연구에 몰두하여 저서를 남기는 데 무게를 두는 대신, 배운 대로 바른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고 이런 정신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쪽을 택했다.

조광조가 찾아갔던 그 겨울, 어린 제자의 앞일을 걱정하면서도 기쁘게 받아들였을 김굉필. 따뜻하면서도 진솔한 한 인간으로서의 그가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조광조에게는 여러모로 좋은 스승이었다.
화순군민신문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