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17세 (5)

조광조 평전
1498년 17세 (5)
  • 입력 : 2021. 03.03(수) 13:40
  • 화순군민신문
그리고 6년 후, 갑자년(1504년)을 피로 물들인 두 번째 사화는 무오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문자가 아닌 침묵이 죄를 입었다. 침묵 속에 묻어뒀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죽음이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정치적으로 활용하기엔 더없이 좋은 불씨였다. 연산군으로서는 부왕에 대한 열등감을 분노로 뒤집기에 맞춤한 ‘공식적’ 개인사가 아니었을까. 연산군은 다시 숙청을 단행했다. 이번에는 임사홍任士洪 등이 적극 나서서 상황을 이끌었다.

연산군은 제정신을 잃고 관련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누가 관련자인가. 누구도 관련자가 아닐 수도, 모두가 관련자일 수도 있었다. 판단의 기준은 ‘임금의 마음’. 어차피 시비를 가리고자 하는 죄명이 아니었으니 임금의 눈 밖에 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무오년을 유배형으로 넘긴 이들에게도 참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죽은 이름들이라 해서 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몇 달 전 귀양지에서 명을 다한 정여창은 자신의 스승이 그랬듯 부관참시를 당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의 사부이기도 했던 정여창이었으나, 그로 인해 더욱 군주의 미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공부할 뜻이 없던 세자에게는 사부들의 엄한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또한 임금의 권위를 가벼이 여기는 오만한 짓거리로 보였던 것일까.

스승 김굉필의 삶

김굉필은 옮겨진 귀양지 순천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국왕의 ‘특별한’ 명으로 참형 후 효수되는 참담함까지 겪어야 했다. 고고한 성품으로 칭송받던 그의 삶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연산군은 유독 김굉필에 대해 그가 죽기 직전 무슨 말을 하더냐 물었다. 형 집행관의 답인즉. “한마디 말도 없이 죽음에 나아갔습니다.”

아무 말 없이 죽음으로 나아갔다는, 김굉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론 당시 선비들의 주요한 덕목이 말수가 적고 몸가짐이 단정하다 정도이긴 하겠는데, 김굉필의 경우는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를 전하는 기록들이 대략 그러하다. 그의 삶을 헤아리게 하는 결정적인 모습은 1485년 스승인 김종직에게 보낸 한 편의 시에 담겨 있다. 그는 이조참판이 된 스승에게 서늘하다 할 정도의 비판적 언사를 숨기지 않았다. 김종직의 제자이자 김굉필의 벗이었던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는 둘 사이에 주고받은 시와 그 배경이 담겨있다. 먼저 김굉필이 보낸 시를 보자.

화순군민신문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