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17세 (4)

조광조 평전
1498년 17세 (4)
  • 입력 : 2020. 11.24(화) 08:15
  • 화순군민신문
그러다가 마침 한 사람이 걸려들었다. 이미 선정을 포기한 채 그릇된 욕망으로 치닫던 임금과, 그런 임금 아래서 출세를 꿈꾸던 이들이 찾아낸 맞춤한 먹잇감이었다. 사화를 주도한 유자광柳子光은 <조의제문>의 글귀 하나하나를 풀어 연산군 앞에 아뢰며 그 부도不道함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임금을 부추겼다.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까지 더해진 것이었다(과거 자신을 소인배로 무시하며 경멸을 감추지 않았던 김종직에 대한 이 좋은 복수의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연산군은 한 걸음 더 나갔다. 김종직은 물론 그의 제자들에게도 같은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왕이 실록청에서 올린 사초를 내보이니 바로 권경유權景裕가 기록한 것이었다. 그 사초에 이르기를 “김종직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충의가 분발하여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의 문장은 여사餘事일 뿐이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무리들의 기롱과 논평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무릇 제자라 하는 자는 모조리 구금하여 국문하는 것이 어떠하냐?” 하매,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시옵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호흡이 척척 맞는, 그 임금에 그 신하였다. 사실 그들이 문제 삼기 전까지 〈조의제문〉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김종직의 글이야 이미 세조 때에 지어진 것으로 별 탈 없이 읽혀오고 있었던바, 결국 어떻게 읽느냐가 문제였다. 이렇게 국왕의 마음이 기울어지자 김종직은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왕실을 능멸한 죄인으로 역사 앞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함께 울분을 토로하던 이들은 동조자의 이름으로 같은 죄를 면할 수 없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글을 읽던 이들 또한 불온한 자들의 당을 이뤘다는 죄명을 달았다. 한마디 말, 한때의 사귐도 용서받을 수 없었다.

김종직은 세상을 뜬 지 이미 여섯 해, 그렇다고 죄줄 방법이 없겠는가. 사형보다 더한 치욕,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가 내려졌다. 문제의 사초를 작성한 김일손金馹孫과 권오복權五福, 권경유는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나라의 변방으로 흩어져 죄인의 이름으로 때로는 천민의 신분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은 평안도 회천으로, 정여창鄭汝昌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이처럼 뜻을 세워 도를 논하던 선비들은 죽거나, 한 번 더 죽거나, 변방의 유배객이 되었다. 그들이 지은 책도, 문제의 사초도 모두 불에 태우라는 명이 더해졌다. 그처럼 불온한 문자는 흔적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문자’에 매우 날이 선 반응을 보이는 임금이었는데, 그 자신의 행태로 보자면 영리한 작전이다. 기록은 기억으로 살아남지 않던가.
화순군민신문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