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17세 (3)

조광조 평전
1498년 17세 (3)
  • 입력 : 2020. 11.17(화) 15:48
  • 화순군민신문
김굉필은 결국 한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6년 후 앞서의 것보다 더 참혹한 또 한 번의 사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학기간은 짧았으나 조광조에게는 유일한 스승이었으며, 자신의 일생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김굉필을 유배로, 그리고 기어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두 번의 사화는 조광조의 젊은 시절 대부분을 지배한 사건이기도 하다. 한 번은 스승과의 만남을, 또 한 번은 스승과의 이별을 불러온.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절망과 그 절망에 대한 극복을 고민하게 했던. 조광조뿐 아니라 글 좀 읽고 생각 좀 있었을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에겐 헤어날 수 없어 보이는 정신의 늪과 같은 사건들이 아니었을까.

무오년과 갑자년, 두 번의 사화

첫 번째 늪은 글의 죽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선비들이 오직 글 때문에 생각 때문에 화를 당했던, 조선의 역사 이래로 없던 일이었다. 무오사화로 불리는 이 참화는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실린 사초史草에서 시작되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살해당한 의제義帝의 죽음을 애도하는 강개慷慨의 글이었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에 대한 비유로 읽혔던 것이다.

세조의 등극 과정은 당시까지도 언급하기 껄끄러운 일이었다. 세조의 직계 자손인 후대 임금들로서는 차마 선조의 잘못을 인정할 수는 없었던지라 세조의 찬탈을 종사를 지키기 위한 결단으로 포장해놓은 채 아슬아슬 버텨가고 있었다. 세조의 욕망에 희생된 사육신도, 그 욕망에 등 돌린 생육신도 아직은 모두 종사의 죄인일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그뿐인가. 단종의 생모라는 이유로 문종의 비가 묻힌 소릉昭陵은 파헤쳐져 그 이름마저 빼앗긴 채였다. 아직 그 사건은 백주에 노상에서 주고받을만한 이야깃거리는 아니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군신 간의 충과 신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며 나름의 원칙을 세운 선비들이 이미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그저 덮어두는 쪽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 소리들을 벌하지 않은 것은 그 생각에 잘못이 없음을 시인하는 일이지만, 들어주지 않은 것은 차마 조부를 찬탈자로 규정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 세조가 먼 조상쯤으로 기억되는 때가 되면, 그때 역사가 바르게 평가해줄 테니 기다려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성종은 선비들의 언로言路를 중히 여기는 군주였다. 침묵이 충신의 덕목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연산군은 부왕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산군의 눈에 비친 성종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임금이었다. 연산군이 생각하는 군주는 부왕처럼 대간들의 ‘말’에 휘둘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는 임금의 권력을 스스로 나눠주는 일, 그래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군주로서의 학업도, 성군이 지켜야 할 도리도, 끊임없이 그것들을 간언하는 대간들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번이 부왕의 덕행과 치적을 본받으라 간언하는 자들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사건건 부왕과 다른 길을 걷겠노라 결심한 임금 같았다.
화순군민신문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