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8년 17세 (2)

조광조 평전
1498년 17세 (2)
  • 입력 : 2020. 11.09(월) 08:04
  • 화순군민신문
그런데 이 겨울 속에 아직 꿈을 꾸는 자가 남아 있었단 말인가. 이런 시절에 도의 뜻을 구하고자 한다니. 더구나 죄인에게 직접 배움을 청하겠다니. 우리의 학문이란 이제 불온한 자들의 위험한 수사로만 남질 않았던가. 제자를 자처한 이상 어떤 화가 닥칠는지 모르는 일이다.
양희지의 소개 글까지 청하여 온 것을 보면 차분히 고민하고 준비해왔다는 뜻일 터. 부형의 만류도 없지 않았겠으나 그 정도쯤은 각오하고 나섰을 것이다. 여간한 배포가 아니다. 열일곱 나이의 다짐이 이러하다면……. 김굉필은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 허락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총명한 눈빛에 기품 있는 몸가짐. 이목을 끄는 수려한 외모였다. 자리를 삼가느라 공손하였으되 선비다운 의연함은 잃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젊음이었다.

유배지의 스승과 제자

조광조의 연보가 전하는 이해의 기록은 대략 이 정도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학문에 뜻을 둔 한 청년이 당대 제일의 학자를 찾는다는, 꽤나 전형적인 줄거리, 다만 그들의 만남이 여느 사제지간과 다른 것은 스승의 처지가 유배객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 유배의 원인이 바로 사화士禍에 있었다. 이해가 바로 무오년, ‘무오사화’가 일어난 1498년이다.
이렇게 제자로 들어온 조광조를 김굉필은 “심히 사랑하여 중히 여겼다.” 그랬을 것이다. 한 젊은이가 존숭의 염을 품고 스스로 제자 되기를 청하여 유배지의 죄인을 찾았으니, 마음 뭉클하지 않았을까. 이 제자는 기대보다도 더 탁월한 자질에 뜻과 행실이 반듯하기까지 했으니, 김굉필로 보자면 그야말로 제자를 제대로 얻은 셈이다. 그 겨울 유배지의 작은 집에서 오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아직 조선의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도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예사롭지 않은 이 행적에 대해 후세는 “난세를 당하시어 험난함을 무릅쓰면서도 그를 스승으로 섬기셨다” 이황李滉, <정암선생행장行狀>, 《정암선생문집》
라고 감동의 어조로 전하기도 한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큰 과장은 아니다. 공부가 때론 무서운 화로 돌아오는 세상이었다.

유림들은 기가 죽어서 들어앉아 탄식만 하고 있으므로, 학사學舍는 쓸쓸하여 몇 달 동안 글을 읽고 외우는 소리가 없었다. 부형들은 그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공부는 과거에 응할 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한다. 많이 해서 무엇하느냐.” 하였다.

그러니 이런 정치범에게 배움을 청하는 행동이 ‘정상’으로 보일 수는 없다. 실제로 그 이후로 조광조에게는 ‘광자狂者’라는 말이 따라붙곤 했다. 미친 사람처럼 공부한다 하여 붙여졌는데, 긍정적인 뜻을 담은 말은 아니었다. 조광조는 꽤 이른 나이부터 행동의 기준을 자신의 배움과 판단에 의거한 ‘도道’에 두었지, 세상의 시선은 그리 신경 쓰며 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성리학을 따르는 여느 유형과는 거리가 있었다.
화순군민신문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