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원 농협중앙회장은 화순군 도암면 출신으로 대내외적으로 인품과 리더십에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최근엔 ‘협동조합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협동조합연맹이 수여하는 로치데일공정개척자 대상 수상자로 지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에 화순군민들의 관심을 고려하여 조선일보 측에 사전 동의를 구하고 본지에 게재한다. <편집자주>



김병원 농협중앙회장은 공식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서울 서대문 집무실에서 점퍼에 운동화 차림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란다. 김 회장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데 현장만 한 곳이 없다"고 한다. 지난 4월에는 4박 5일 일정으로 횡성·원주·충주·음성·진천·천안·고령·청도·남해·구례·익산을 돌았다.

소독 나선 회장님 - 김병원 농협중앙회 회장이 지난 1월 30일 경기 안성에서 구제역이 발생하자 방역을 위해 인근 지역인 충남 천안을 긴급 방문해 축산차량을 직접 소독하고 있다. 2016년 취임한 김 회장이 지난 3년간 농촌 현장을 찾느라 돌아다닌 거리는 지구 여덟 바퀴에 해당하는 32만㎞에 달한다. /농협중앙회

원주에서는 하우스 농사를 짓는 부부를 만나 "로컬푸드 매장을 활성화시켜 달라"는 얘기를 들었고, 음성에서는 쌈채소와 수박 농사를 짓는 청년 농업인들을 만나 농촌에 불고 있는 세대교체 바람을 실감했다. 이달 초 태풍 링링이 상륙했을 때도 경남과 전남의 과수 농가를 찾아 지원 대책을 내놨다. 이런 식으로 김 회장이 2016년 취임 후 3년여간 돌아다닌 거리가 32만㎞, 지구 여덟 바퀴에 이른다. 그는 "빈농 출신이라 그런지 서울 사무실보다 농촌이 마음이 더 편하다"고 말했다.

◇ "농가 소득 5000만원 시대 성큼"

현장을 돌아다닐 때마다 김 회장은 농가 소득 5000만원 시대가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가 3년 전 중앙회장 선거에서 '2020년까지 농가 연소득 5000만원' 공약을 내세웠을 때만 해도, 이 목표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지난해 농가 소득이 4207만원을 기록해 처음으로 4000만원대를 돌파했다.

김 회장이 농가 소득을 높이는 수단으로 초점을 맞춘 것은 생산비 절감이다. 그는 "대부분의 농가가 남의 기계를 빌려 작은 면적에 농사를 지으니 매출보다 비용으로 새나가는 돈이 더 많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이에 농협은 사료값을 할인해 주고, 올해는 농약 가격도 10% 이상 내렸다. 지난 3년간 농자재·사료 값 인하에 농협이 직접 기여한 액수만 1조2000억원에 달한다.

공약을 절반쯤 달성한 셈이지만, 농촌 내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김 회장은 "농민의 연령과 작물, 경작 면적 등에 따라 소득 격차가 크다"며 "이를 해소하려면 새로운 소득 증대 사업 추진이 필수"라고 했다. 그는 농가 소득 증대 방안을 찾는 게 앞으로 우리 농민들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쌀값 상승은 정상화 과정… 쌀 소비 늘려야"

지난해 농가 소득이 대폭 늘어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쌀값 상승이다. 2016년 80㎏당 13만원 하던 쌀값은 지난해 19만3000원까지 올랐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20년 전 수준인 13만원대로 하락했던 쌀값이 정상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해달라"며 "쌀은 가장 많은 농가가 재배하는 작목이며 주식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혼이며 자존심"이라고 했다.

다만 쌀 수급 조절은 필수적인 과제라고 했다. 현재 정부가 쌀 공급량을 줄이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쌀 생산조정제에 대해선 좋은 방안이지만 인센티브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쌀 생산조정제는 벼농사를 짓는 농민이 다른 작물을 재배하거나 휴경(休耕)할 경우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제도다. 콩·옥수수 등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논 1㏊당 340만원, 휴경하면 280만원을 준다.

김병원 농협중앙회 회장은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가진 본지와 인터뷰에서 "농가 소득 5000만원 달성을 위해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김 회장은 "올해 생산조정제 참여율이 저조한 것은 벼농사를 짓는 게 더 이득이기 때문"이라며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선택했을 때 최소한 벼농사 소득과 같거나 많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했다.

궁극적으로는 밀가루를 쌀가루로 대체해 쌀 소비를 늘린다는 목표도 실행 중이다. 김 회장은 "1인당 연간 밀가루 소비량 33.2㎏ 중 10%만 쌀가루로 대체해도 17만t의 수요 창출이 가능하다"며 "쌀 소비 촉진에 이만한 수단이 없다"고 했다. 농협은 지난해 오리온과 함께 경남 밀양에 제과류와 쌀가루를 생산하는 식품 공장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그래놀라 제품은 지난해 마트와 온라인 등에서 114억원어치나 팔렸다. 최근에는 롯데제과와 협력해 우리 쌀 20%가 원료로 사용되는 '우리쌀 찹쌀떡 아이스컵'도 출시했다.

◇ "4차 산업혁명에 농업의 길 있어"

농촌 소득 증대를 위해 김 회장이 또 주목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산업인 농업과 4차 산업혁명이 무슨 관계일까 싶지만, 김 회장은 "농업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하면 시너지 효과가 무궁무진하다"면서 스마트폰을 꺼내 'NH농사봇'이라는 앱을 보여줬다. 농촌진흥청과 함께 만든 이 앱은 초보 농부들에게 쉽고 편하게 농사 기술을 알려주는 인공지능 챗봇 서비스다. 대화창에서 '양파 도매가격'이나 '고추 심는 법' 같은 질문을 하면 현재 시세나 농사 기술 정보가 실시간으로 뜬다.

농업에 4차 산업혁명을 본격적으로 접목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김 회장은 취임 후 중앙회에 '범농협 4차 산업혁명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미래경영연구소에 '4차 산업혁명 전담팀'을 구성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하고 농기업을 육성·지원할 통합 연구개발(R&D)센터 설립 작업도 진행 중이다.

김 회장은 "계열사별로 4차 산업혁명 과제를 작년에 84개, 올해 86개 발굴해 차근차근 진행 중"이라며 "인공지능 업무 도우미 '아르미 AI'를 개발해 콜센터에서 활용하는 등 주요 과제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농협중앙회장 임기가 4년 단임으로 바뀌면서, 김 회장 임기는 내년 3월 끝난다.

김 회장은 "농가 소득 5000만원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 할 일이 많다"며 "마지막 날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고 했다.


[그의 청춘은 전원일기… '왕건이 탐낸 쌀'로 남평농협에서 대박]

김병원 농협중앙회장의 왼손 엄지에는 수십년 전 생긴, 뭔가 날카로운 것에 깊게 팬 상처가 있다. 전남 나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나고 자라 어릴 적부터 소 먹일 여물을 만드느라 낫질과 작두질을 하다 생긴 상처다.

자연스레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978년 말단 직원으로 전남 남평농협에 입사했다.

'농업인 소득 증대'는 김 회장이 1999년 남평농협 조합장이 됐을 때부터 역점을 둔 사업이었다. 조합장이 된 첫해에 쌀이 남아돌면서 가격이 급락하자 김 회장은 지역 농민들에게 고품질 쌀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농민들은 "안 그래도 쌀이 남아도는데 고품질 쌀을 찾는 사람이 어딨느냐"며 완강히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회장은 흙을 갈아엎는 객토부터 시작해 고품질 쌀 생산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전국 최우수 쌀 브랜드로 손꼽히는 '왕건이 탐낸 쌀'이다. 일반 쌀보다 20%가량 비싼 가격에도 친환경 쌀로 인기를 끌면서 나주 지역 농가 소득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늦깎이로 대학 공부를 시작한 것도 농가 소득 증대 방안을 체계적으로 연구해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57세 나이에 '한국 농가의 양극화 실태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전남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농협 회장 취임 후에는 40년간 '협동조합인'으로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위드하라' '단 한 걸음이라도 함께 가라' 등 저서도 냈다. 책을 판 수익은 농협재단에 전액 기부해 청년 농업인 해외 연수 자금으로 쓰이고 있다.

그간의 기여를 인정받아 김 회장은 '협동조합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로치데일 공정개척자' 대상 수상자로 선정돼, 16일 르완다 키갈리에서 열리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 글로벌 총회에서 상을 받는다.

기사 제공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