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간채 화순실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 전남대 명예교수

전날 오후엔 하늘에 먹구름이 번져서 날씨가 염려되었으나, 그날 아침 하늘은 맑고 높았다. 6월 산하에 출렁이는 녹음물결은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웠고, 바람에 실려 오는 강렬한 생명의 약동이 가슴을 쳤다. 주차장에 모인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서 실무자들 얼굴에 활력이 가득했다. 90세를 넘어선 원로의 참여가 감동이었다면 홍콩 출신 대학원생의 동행에서 푸른 미래를 보았다.

아침 8시에 화순을 출발하여 부안군 우반동에 자리 잡은 ‘반계서실’에 도달한 시간은 10시 즈음이었다. 한국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32세에 이곳으로 이거하여 한 평생을 보냈다. 언덕길이 잘 다듬어진 변산 중턱의 서실에서 보면, 좌우 산기슭이 평화롭게 뻗어 내리고, 탁 트인 들판을 아담한 동산들이 품어 안아 참으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마을을 이루어냈다. 세기적인 지식인이 출현할 경승이라 할 만하다.

이 서실에서 반계의 대표 저작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이 태어났다. 이 책 외에도 성리학에 관한 저서를 비롯하여 역사, 지리, 병법, 문화 등의 각 분야에 20여 종에 이르고 있지만, 반계수록은 내용과 형식에서 매우 인상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내용면에서 이 책은 국가의 주요 제도들, 즉 토지, 행정, 교육, 국방 등을 포함하는 정책 전반에 관하여 깊은 경륜과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특히 국가경영의 근간으로 본 토지정책에서 경자유전, 사유제한, 세습금지 등의 원칙이나 인재 등용에서 서얼 차별을 넘어서는 관점은 매우 선진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편찬할 당시에 이를 주관했던 경상도 관찰사 이미(李瀰)가 이 책은 실로 나라와 세상을 건질 만한 위대한 저작이라고 평가했음을 주목할 만하다.

다음에는 고창에 소재한 이재 황윤석(1729-1791)의 생가와 유적을 찾았다. 부안에 인접한 곳이어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였다. 생가가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재현된 초가의 높은 마루와 지붕이 인상적이었다. 두껍게 쌓인 초가지붕의 벼 마름과 뒤뜰에서 크고 아름답게 성장한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예부터 선비의 기개와 품위를 상징하는 이 나무가 매우 크고 높고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어서 한 시대 지식인의 자필일기(이재난고)에 담긴 인생의 길고 깊은 행적을 보고 있는 듯했다.

황윤석의 저술에는 이재난고(頤齋亂藁) 이외에도 이재유고(頤齋遺稿), 이재속고(頤齋續稿), 이수신편(理藪新編) 등이 있으나 이재난고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황윤석이 조선 사회의 정치 행정 · 경제산업 · 문화예술 그리고 도학과 예학, 지리와 산학 등 여러 부문에 걸쳐 개인이 보고 듣고 배우고 생각한 경험에 관한 기록이다. 실학자 황윤석은 북경을 거쳐 전래된 서구의 지식을 받아 이를 국내에 소개한 공이 크고, 동양의 전통 철학과 서구의 새로운 지식 간에 조화를 추구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이 책은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으로서 57책(6천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적지를 둘러보고 나니, 점심이 약간 늦은 때여서 김치찌개로 준비한 소찬이었지만 다들 맛있게 드셨다. 이어서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고창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 김제시 성덕면에 있는 해학 이기(1848~1909) 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원래 안채 1동과 사랑채 1동의 초가이었으나 최근에 신축하면서 안채를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초가로 복원했는데, 이 분의 열정적 활동에 비추어보면 다소 아담하고 순박하지만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해학 선생은 석정 이정직, 매천 황현과 더불어 호남의 삼재(三才)로 불리어지기도 할 만큼 뛰어난 천품을 발휘했다. 그는 성리학 이외에도 천문, 지리, 음양, 병복 등의 분야를 섭렵한 실학자이면서 호남학회, 단학회 활동 등의 학술운동뿐만 아니라 정치개혁운동, 민족계몽운동, 항일운동 등 개혁적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으로 평가된다.

답사의 마지막 순서는 순창읍 가남리에 위치한 여암 신경준(1712-1781)의 실학 사적이었다. 여기에는 신경준의 사적뿐만 아니라 그의 선조들의 행적이 담긴 유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아담한 동산으로 솟아오른 가남리 남산대 일원에는 일관문, 자혜당, 남산사, 그리고 문화재 보관소인 유장각과 귀래정이 있다. 특히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귀래정에는 서거정, 강희맹 등 옛 선인들의 글이, 오랜 세월을 이겨내면서 우리에게 역사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신경준은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이름이 높다. 그는 지리학 분야에서 강역지(疆域誌)·강계지(疆界志)·산수고(山水考)·도로고(道路考)·가람고(伽藍考) 등의 저술을 남겼고 언어학 분야에서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가 대표적이다. 특히 영조의 명을 받아 편찬한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는 각 도별로 전국 330여 개의 군현 지도를 모은 군현 지도집 8권, 팔도의 도별 지도집 1권, 그리고 족자 형태의 전국지도 1축으로 구성된 지도로서 당시까지 지도학의 성과를 총집합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 책들이 만들어지는 형식 또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를테면, 반계가 그 책을 19년 만에 완성했다는 사실 앞에서, 장장 19년 세월 동안 한결 같이 가슴에 품고 그려온 상상의 세계를 보고 있음에서 우리는 영혼의 떨림을 숨길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영혼은 무엇을 품고 이 세월을 살아오고 있는가? 또한 이재 황윤석이 열 살 때(1738년) 쓰기 시작한 일기가 이승을 떠나기 이틀 전(1791년 4월 15일)까지 50여 년을 써 왔다는 사실 앞에서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을 감출 수 없다. 우리는 얼마 동안이나 일기를 썼으며, 지금은 쓰고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적어도 300년 전에 척박한 변방의 전라도 땅에 살면서도 탁한 사회의 등불이 되었던 선배들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귀를 울린다.

순창에서 답사를 마치고 광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간단한 소감 발표회를 가졌다. 참가자 거의 모두가 감명 깊었던 소감과 전라도 변방에 대한 소외와 차별을 토로했다. 학문세계에서 소외와 배제의 오랜 역사, 그리고 우리에게 불리했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강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이를 두 가지 질문으로 종합한다. 우리는 무엇을 공부하고 배워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우리들 자신을 알자’, 남의 것보다 우리 것을 먼저 배우고, 또 우리들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아닌 남에게 의존하는 역사를 극복하자는 의미이다, 부당하게 외면당해 묻혀 졌거나 평가 절하되었던 우리 과거의 아픈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