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 남화토건 과장

언젠가 어느 글에서 「지혜 주머니」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어머니가 장가가는 아들에게 비단 주머니를 주었다. “어미 생각이 나거든 열어보거나.” 결혼한 아들이 비단 주머니를 열자 종이학이 가득했다. 그 중 하나를 펼쳐보니 이런 글귀가 쓰였다.
‘아들아 아버지처럼 말을 아껴라. 생각이 같을 때는 당신과 동감이라면 된다. 빙그레 웃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나 거절의 뜻을 전하기도 한단다.’
비가 내리는 날 어머니가 생각 난 아들은 종이학 한 마리를 또 꺼내어 읽었다.
‘상대방 말을 정성껏 들어라. 네가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가 크단다.’ 과연 어머니의 조언은 결혼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이 같은 어머니의 조언이 어찌 결혼 생활에만 큰 도움이 되었을까? 아들이 살아가는 평생 동안 크나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좀 쉬었다 하시지요.’
‘나는 괜찮다. 너나 좀 쉬었다 해라.’
‘어머니 좀 드시지요.’
‘나는 배부르다. 너나 어서 먹어라. 많이 먹어라.’

나는 이 같은 어머니의 말씀을 자주 들으면서 성장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당신 시집오던 날의 이야기를 내게 해주신 그 말씀은 지금도 내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
가마가 동네 앞에 왔을 때 잔칫집이 보이나 싶어 가마 문틈으로 가만히 내다보았다. 잔칫집은 보이지 않고 저쪽 산 밑에 오막살이집 마당에 애들 서너 명이 노는 모습만 보이더라. 그렇게 부잣집이라고 하던데 설마 저 집이 잔칫집은 아니겠지? 생각했었다. 주점(신부가 잠시 쉬었다 가는 집)이 끝나고 신랑 집으로 갔는데 가마 문틈으로 보았던 그 오막살이집이 바로 그 집이더라.
주점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시면서는 목이 메여 말끝을 잊지 못하셨으며, 그 말을 들은 나도 가슴이 아파 차마 이 글에다 쓸 수가 없다.
중매쟁이 말에 의하면 네 기둥을 다 빼어내도 곡식이 가득차서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단다. 그런데 그런 부잣집에 먹을 것이라곤 자그마한 장독그릇에 나락(벼)이 절반이나 담겨있더라. 그래도 그걸 먹고 너네 낳고 지금까지 이렇게 안 살아왔냐? 이것이 73년 전 어머니가 열다섯 나이에 시집오던 날 있었던 이야기를 내게 해주신 것이다.

나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아들만 칠 형제를 둔 큰 부잣집이 있었다.
그 부잣집 여섯째 며느리가 어머니 막내 동생으로 나에게는 이모가 된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가난한 아버지와 결혼해서 온갖 고생 다하시며 살아오셨는데, 이모는 어떻게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왔대요?” “그것이 그리 궁금했더냐?”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쉬고 나서 말씀을 하셨다.
“그랬드라냐? 내가 네 아버지와 결혼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부잣집 영감님이 늘 보시고 사람을 시켜서 혹시 그 사람(우리 어머니) 여자 동생 있는지 좀 알아보라고 해서 네 이모가 그 부잣집 며느리가 되었단다. 그런데 어디 쓰겄냐? 명이 짧아 그랬는지 세상을 잘못 만나서 그랬는지 6.25 전쟁 통에 일찍 죽고 말았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또 긴 한 숨을 쉬고 나 “소주 한 잔 먹어야겠다.” 옛날 고생하며 살아오신 가슴에 맺힌 한과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슬픔을 소주 한 잔으로 다 푸실 모양이다.

술잔을 비우신 어머니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니 설움 내 설움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단다. 그런 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남 배고픈 것을 알 것이냐? 그래서 네 아버지는 지금도 (5~60년 전) 점심때가 되면 길 가던 장사꾼도 ‘우리 집에 가서 요기나 좀 하고 가시오.’라고 하며 생전 처음 본 사람도 집으로 데리고 와서 밥 먹여 보내고 하지 않더냐? 사람이 배가 잔뜩 고프면 잠이 오지 않는단다. 네 아버지를 보니 그러더라. 배급을 타서 겨우 먹고 살 때 한 끼라도 늘려 먹을 요량으로 매일같이 죽을 끓여 먹고 살 때 일이다. 네 아버지가 자다 말고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는다고 그냥 밥 한 그릇 해서 먹어 보자고 하더라. 자다 말고 한 밤중에 밥을 해서 모처럼 고봉밥 한 그릇 담아드리고 남는 밥 나도 한술 먹고 잘 때가 있었단다. 다음날 아침 밥상에서 죽 건더기는 다 건져서 딸과 아들한테 나누어 주고 당신은 국물만 드시고 일하러 갈 때도 있었단다. 지금은 배부르게 밥 먹고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이제 그 지긋지긋한 세상은 생각하기조차 싫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이 중요함을 이루는 말이다. 또한 큰 복은 하늘이 주고 작은 복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大福은 在天이요 小福은 在勤이다’란 옛말도 있다. 이와 같은 속담과 옛말은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열심히 살아오신 모습을 보고 나온 말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버지 열아홉 살 어머니 열여섯 나이에 두 분이 결혼해서 가진 것이라곤 다랭이 밭뙈기 하나 없이 오직 근면과 성실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건강 그것이 전 재산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살아오신 세월이 얼마나였을까? ‘이제는 배부르게 밥 먹고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그 지긋지긋한 세상은 생각하기조차 싫다’하신 어머니의 이 같은 말씀은 지금까지 가슴에 안고 살아오신 한을 다 푸신 것 같다.

어떤 어머니는 조언을 글로 써서 비단주머니에 담아 장가가는 아들에게 주었다고 했으며, 아들은 어머니의 조언을 보고 결혼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비록 글로 써서 비단주머니에 담아 주신 조언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것 모두가 내게 주신 조언이고, 내가 70평생을 살아오는데 가르침을 주신 교훈이 되었다.

‘가마 문틈으로 보이던 오막살이집이 가서보니 내가 살 집이더라’ 하신 말씀이나, 밤중에 밥 한 그릇 해서 먹었다고 아침 밥상에서 죽 건더기를 다 건져서 아들, 딸한테 주고 국물만 드시고 일하러 가셨다는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듣고 젖었던 내 가슴은 지금도 젖어있다. 30나이에 얻은 직장을 40년이 지나고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은 그때 젖어있는 가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