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백희성 씨는 "나에게 건축이란 기억을 담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건축은 낡고 삐꺼덕거리는 마루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보존하고, 손때 묻은 벽면의 추억을 그대로 살려내는 일이다.

백씨는 프랑스 파리에 살던 시절 아름다운 집을 볼 때마다 그 집의 우편함에 편지를 넣곤 했다. 그는 "당신의 집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글을 진심을 담아 전했고, 가끔 운이 좋을 때면 집주인에게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년간 그는 파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가졌다. 이 시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삶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한국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세계 무대에서 뛰고 싶은 열정에 무작정 프랑스로 달려간 청년. 그는 2010년 젊은 건축가들에게 수여하는 '폴 메이몽 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받는 영광을 누렸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대회다. 백씨는 8년 만에 탄생한 수상자였다. 그간 이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하는 신예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파리의 균등 발전을 담은 그의 도심 개발 아이디어는 심사위원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백씨는 프랑스인들에게 한 몸에 존경을 받는 장 누벨 건축사무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세계 최고 부호들이 맡긴 프로젝트가 밀려들고 돈 걱정 없이 모든 작업을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잘나가던 그였지만 3년 만에 '쿨하게' 사표를 던졌다. 이유는 자본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건축 세계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기억을 담은 건축'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고 그는 "후회는 없다"고 답했다. 현재 그는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일한다.

"요즘엔 전남 화순에 들어설 식품문화예술단지 설계를 맡고 있습니다. 공장을 짓는 개념으로 제가 해오던 일과는 거리가 멀어 처음엔 거절했죠. 하지만 공장이나 축사 같은 소위 혐오시설도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다시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 작업을 위해 화순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이곳은 한국전쟁 이후 양민 학살이라는 아픔을 안고 있다. 그러나 '화합과 순응'이라는 아름다운 의미도 갖고 있는 화순은 이 이름에 걸맞게 전국에서 정자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다. 백씨는 "상처도 큰 곳이지만 서로 보듬고 살아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며 "이러한 시간을 건축에도 표현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식품문화예술단지는 지역민을 위한 특별한 공간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백씨는 또 다른 실험에도 돌입한다. 바로 기존에 없던 공장을 만드는 혁신이다. 그는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작업장에 대한 우울한 기억이 많았다"며 "이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건축을 통해 이를 치유해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백씨는 공장 작업장을 숲과 하나가 되는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일을 하면서도 숲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게 해 근로자들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건축을 통해 불편한 기억을 따뜻한 기억으로 바꿀 수 있다는 그의 또 다른 철학이 담기는 셈이다.

백씨가 이같이 따뜻한 건축에 관심을 갖는 또 다른 배경에는 다름 아닌 지체 장애인 동생이 있다. 그는 아픈 동생과 살아오면서 장애인 시설이 혐오시설로 외면받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한때 자신도 동생의 존재를 애써 외면해왔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는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힐링"이라며 "결국 아픈 기억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가져가면서 잘 만들어 가야 하는 존재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건축은 '기억을 담는 공간'이기 때문에 늘 작업 기간이 길다. 건축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반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백씨는 "이 긴 여정이 끝나갈 무렵이면 건축주들이 오히려 더 아쉬워한다"며 "건축가로서 이 시간을 함께하는 것 자체가 가장 즐겁다"고 덧붙였다.

백씨는 그 어떤 분야보다도 건축은 참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건축에 관심이 있다면 기꺼이 뛰어들 만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현재 건축 분야는 빅데이터를 넣으면 이에 맞는 디자인과 용적률, 그리고 수익구조까지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나올 정도로 인공지능과 관련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건축가들이 4차 산업혁명의 파고에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전망도 쏟아진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75억 인구가 있다면 그들은 모두 다 각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도 모두 다 나름의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억과 이야기들이 건축으로 표현된다면 얼마나 많은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요. 건축은 결코 돈 많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