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農巖) 김창협(1651~1708)이 그 옛날 지은 시(詩) 가운데 이런 시가 있다.

이어진 봉우리들 푸른 하늘로 치솟고(연봉무수상청천·連峰無數上靑天)/그 아래 쪽빛 물결이 한줄기로 돌아 흐르네(하유창랑일도천·下有滄浪一道川)/깎아지른 험한 바위 귀신을 닮은듯 하고(삭출층암유신귀·削出層巖類神鬼)/맺혀 서린 싱그런 푸르름은 구름연기와 흡사하구나(결위공취사운연·結爲空翠似雲煙)…(이하 생략)

농암은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와 보산리, 장항리 일대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는 적벽(赤壁)을 그렇게 유려하게 그려냈다.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전해오는 조선 말의 김병연(1807∼1863) 또한 화순 적벽을 본 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 물이더라'라는 시를 남겼다. 타고난 천재 시인 김삿갓은 적벽에 취해 인근 동복에서 삶을 마감했다. 호남의 대유(大儒) 하서 김인후도 적벽시를 남겼으며 석천 임억령은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 했다. 조선 중종 때 실패한 개혁가 조광조는 능주로 유배와 사약을 받기 전 적벽을 찾아 깊은 한을 달랜 적이 있다. 노산 이은상은 적벽을 선계(仙界)에 비유한 바 있다. 여지도서와 대동지지는 물론 주변 곳곳의 누정 편액 현판, 상량문, 주련, 시·기문 등은 적벽이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전해준다.

문화재청은 최근 오랫동안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찾는 경승지였던 적벽을 국가 명승지(제112호)로 지정했다. 억겁의 세월에 걸쳐 형성된 지질학적 가치와 빼어난 절경에 바탕해 이름을 얻게된 역사적 연륜 등을 감안해 결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적벽'이라는 명칭은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돼 동복으로 유배돼왔던 신재 최산두(1483∼1536)가 지었다. 그에 따르면 화순 적벽은 중국의 후한말 삼국지의 주요 무대로 위(魏)·촉(蜀)·오(吳) 3국이 대전(大戰)을 벌인 중국 양쯔강(揚子江)의 적벽에 버금간다. 이름 그대로 붉은 빛을 띤 절벽,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로 치솟은듯 우뚝한 수직의 적벽은 가히 보는 이들을 압도할만 하다. 물염적벽과 창랑적벽, 보산적벽, 노루목 적벽 등 4개의 연이은 적벽 가운데 노루목 적벽이 단연 압권이다. 필자의 원적은 화순군 이서면이다. 조상 대대로 물맑은 이곳에서 살다가 동복수원지가 만들어지면서 실향민이 됐다. 매년 추석 무렵이면 행정선을 타고 적벽 인근의 선산에 성묘와 벌초를 간다. 지척으로 비껴가는 적벽은 볼 때마다 경외감을 갖게할 정도다.

기사출처: 무등일보 김영태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