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이연자

봄볕이 따사로운 장날, 시장에 들렀더니
거기엔, 벌써 봄의 전령사들이 아줌마들의 좌판 위에 가득했다.

며칠 후면 부모님 생신이다.
쌉쓰레한 씀바귀, 냉이, 달래, 쌀함부리로 나물도 무치고, 샛노란 봄동잎으로
칼칼한 생김치를 담글 생각을 하니
제법 효녀라도 되는 듯 기분이 흐뭇해졌다.

돌아가는 길에
농약 파는 가게에 들러 뜸물약도 샀다.

작년에는 감이 제법 열렸지만, 도중에 낙과해 상심이 컸다.

남편은 도무지 식물을 키우는 것을 이해 못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지만,
맘이 심란할 때 흙 향기를 맡으면 심신이 편안해짐을 느끼는 건,
진정 자연만이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해독제가 아닐까 싶다.

올해는 삽목한 지 5년 된 다래나무가 첫 꽃을 피울 것이고,
감·대추·사과·매실이 가득 열리게 하려면 지금부터 농약도 하고 웃거름을 줘야 할 것이다.

작년에 비가 많이 온 뒤에 약을 게을리 해 빈손여서.
'자식을 키우는게 농사짓기와 같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제는 아들 녀석이 서울 소재의 직장에 인턴이 되어 내 곁을 떠났다.

돌이켜보면, 착하게 성장해줘 고맙기도 하고, 명석한 엄마가 아닌 탓에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미련함에 마음고생 많이 했을 것이다.

재수 시절부터, 가끔씩 공부하는 일이 힘들다 불평할 때마다
인도 최초의 경전'숫타니 파타'의
글귀속에"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는 글귀를 아들의 귓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먹였다.
원래 인도의 무소는 뿔이 하나지만, 우직한 성품으로 갖은 유혹을 물리침을 빗대어
부처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는 시경속의 가르침이다.

사실, 지금 고백하자면,
공부가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걸 인정하면 아들의 마음이 해이될까 조바심이 들었던 것이다.
나이 들면 차츰 터득하겠지만,

스스로 학문적 지식을 얻기 위해 하는 공부는 즐겁지만,
사회인이 되어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긴 갈등을 해결하고,
조화로운 삶을 갖기가 훨씬 어렵다는 걸 금세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온전히 네 인생이고, 네 몫이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다소 진부한 충고를 할 뿐이다.

요즘 갱년기 증후군인지, 아들의 부재로 인한 헛헛함인지 새벽 내 잠이 안와
이것저것 손대다가 컴퓨터 동영상 강의를 들으려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작업표시줄에 볼륨 아이콘까지 사라져 당황스런 나머지 아들에게 물었더니 문자가 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슈!"
준대로 받는다 생각하니
'쿡'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아들이 머물던 서재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