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진 산기슭에 형성된 포도밭과 마을

■척박한 땅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나는 많은 여행을 하지만 가본 모든 곳이 기억에 남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동유럽 3개국 여행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여행지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곳을 보다 깊이 보고 느끼는 여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의 여행 중에 좋은 계절과 날씨는 덤이었다.

▲비탈진 산기슭에 형성된 계단식 포도밭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오스트리아 바카우 지역에서의 추억이다. 바카우 지역은 도나우 강 상류의 유명한 와인 재배지이며 아름다운 고성들이 있는 시골 마을들로 특히 뒤른스타인은 그 대표적인 마을이다. 바카우 지역은 ‘바카우 문화경관’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역이다.

바하우 문화 경관은 멜크(Melk)와 크렘스(Krems) 사이의 도나우 강 상류 지역에 펼쳐진 곳으로 건축[수도원, 성, 폐허], 도시 설계[도시와 마을] 등 대단히 훌륭한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포도밭으로 주로 이용되었던 농지 사용의 역사를 비롯해 선사시대 이래 이 지역에서 발전해 온 많은 흔적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다.

도나우강을 끼고 들어선 마을들 가운데 멜크에서 크렘스에 이르는 약35Km 의 좁은 지형을 바카우 계곡이라한다. 이 계곡은 경작지가 별로 없고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짓기가 어려워 예로부터 산비탈에 흙을 덮어서 고소득작물인 포도나무를 재배하였고 이를 활용하여 세계적인 명품 백포도주인 바카우와인의 주생산지가 되었다고 한다.

▲도나우 강변 마을

바카우란 ‘은으로 빛나는 띠’라는 뜻인데 마을사람들은 길게 흘러가는 도나우강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한창 깊어가는 때였다. 불어난 도나우강은 정말 빛났다. 도나우강 상류 강줄기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바위산과 그 위의 고성, 그리고 나지막한 언덕에 형성된 계단식 포도밭과 작은 마을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변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그리고 비탈진 산자락에 형성된 계단식 포도밭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강 상류인데도 거대한 유람선과 벌크선단, 바지선들이 수시로 지나가는 도나강은 이 지역의 빛나는 보배였다.

이러한 자연 조건은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생산지가 되었으며 더불어 고급 화이트 와인 생산지가 된 것이다.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만찬 때 건배제의 용으로 사용된 와인이 바카우산 화이트 와인이었다고 한다. 물론 유럽 왕실의 주된 만찬에도 사용되는 와인이라하니 얼마나 유명한지 알겠다. 이렇게 유명한 와인 생산지인데 우리는 그곳에서 와인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아쉬웠다.

■있는 그대로를 활용하는 마을

바카우 일대 마을 중 뒤른스타인 마을은 그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이 마을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전쟁을 할 때 영국으로 귀국하다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붙잡혀 1년 동안 감금되었던 뒤른스타인성이 있고 이는 마을의 상징처럼 존재한다. 성은 마을 뒤 높은 바위 산에 있다. 성안에는 작은 마을도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작은 시골처럼 한적하다. 멈춰버린 중세시대의 시골처럼 보이는데 마을은 의외로 활기차다. 적당히 많은 여행객들이 마을을 찾는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포도수확이 한창이었는데 마침 포도 수확하는 한 가족을 만났다. 일행은 앞서 마을로 들어갔지만 나는 그들과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고 한 가족이라 했다.

그들은 포도 한송이를 줬는데 그 포도는 너무너무 달고 맛있었다. 나는 아직 그렇게 달고 맛있는 포도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깨끗하고 정갈한 마을 안 집집마다 빨간 제라늄 꽃 화분을 내걸어 골목길을 화사하게 했다.

와인의 마을답게 마을 곳곳에는 호이리거(햇포도로 만든 포도주 파는 가게) 가게가 있었는데 가게 앞에 쌓여 있는 빈 와인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을에 남아있는 중세시대 성을 그대로 호텔로 활용하여 숙박을 했는데 호텔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골목마다 있는 호이리거 가게 안에는 와인을 사기 위한 여행객들로 붐볐고 와인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그렇게도 맑게 들릴 수 없었다. ‘와이너리(포도주 양조장) 유료투어’도 있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참가하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대신 마을 2층 카페에 올라가 우리 회원들은 여유를 즐기며 차를 마셨다.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 골목길을 오가는 여행객들의 재잘거림. 회원들의 상기된 얼굴. 지금도 그 시간 그 공간이 눈 앞에 선하다.

마을을 감싼 산비탈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싼 계단식 포도밭이 아늑하다.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강을 따라 걷다가 낡은 성벽에 기대 앉으니 길게 흘러가는 강줄기와 바하우 계곡의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강바람의 흥얼거림, 서걱대는 나뭇잎의 화음, 흘러가는 도나우 강물의 합창, 햇살에 영글어가는 포도들의 재잘거림, 이국의 온갖 자연의 생동하는 소리를 듣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 대 여섯명의 사내들이 올라와 약속이나 한 듯이 배낭에서 와인잔을 꺼내들더니 각자의 잔 가득 포도주를 따랐다. 그리고는 높이 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서는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며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며 와인을 마셨다.

그들의 삶의 태도가 한없이 부럽기만 한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인생의 참맛이란 이런게 아닐까 싶었다.

■에필로그

우리 화순에는 왜 이런 곳이 없을까. 없다기 보다는 뒤른스타인 마을 같은 곳을 만들지 않았다는 게 맞는 표현 일게다.

우리군 동복면 독상리, 한천리, 연둔리, 구암리 일대를 가보라. 얼마나 아름다운지. 동복천을 끼고 1킬로 정도 형성된 연둔리의 마을 숲, 방랑시인 김삿갓이 마지막 숨을 거둔 구암리에서 한천리로 이어지는 한적한 길은 영혼이 살찔 것 같은 자연경관과 여유로움을 줄 것이다. 또한 한천리를 휘감은 마을 숲과 돌담이 정갈하게 남아 있는 마을, 한천리 가게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시는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맛은 또 어떤가.

근대 호남서양화단의 개척자인 오지호 선생 생가와 오지호미술관이 있는 독상리에 머물면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여유를 갖는다면 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이겠는가.

바카우 지역의 도나우 강과 계곳 비탈에 형성된 포도밭, 그리고 작은 마을 등 이 모두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문화관광 상품인 것이다.

이번 동유럽을 배움 여행하고 느낀 점은 관광자원이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게 관광자원이었던 것이다. 이 자원을 알뜰하게 가꾸어 가는 것이다.

21세기는 힐링의 시대이다. 자연이 주는 감동이 그 어떤 것보다 큰 것이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예쁘게 가꾸어 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관광상품 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