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달구리마을 봇도랑과 다랑이 논은 농사를 짓지 않는 곳이 많아 논둑이 허물어지고 풀이 무성한 채 방치돼 있다.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달구리 마을 봇도랑과 다랑이논은 국가중요농업유산과 세계중요농업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농업 유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달구리 마을의 봇도랑과 다랑이논은 없다.

다만, 과거에 먹고 살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만든 논들이 있었고, 논에 물을 대기 위해 10㎞가 넘는 봇도랑을 팠다는 이야기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라져가는 농업 유산을 찾아내고, 보존하는 것은 국가중요농업유산과 세계중요농업유산이 지닌 또 하나의 가치다. 아름답고, 신기한 농업 유산도 많지만 우리가 흔적만 남아 있는 달구리 마을 봇도랑과 다랑이논을 잊지 않고, 되살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것들=지난달 29일 오전, 달구리 마을 주민 하만(83)씨의 안내로 붓도랑과 다랑이논을 찾았지만 풀이 무성하게 자라 접근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뒷산을 오르며 하씨는 손가락을 움직여가며 “이곳도 논이고, 저곳도 논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현대화 과정에 마을 빈집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한 논들도 생겨났다.

또 농업이 기계화되면서 산비탈 논에서 일하기 힘들어지자 아예 농사를 포기하거나 흙을 파내 농지를 개량하기도 해 과거 다랑이논의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다. 벼농사를 포기하고 아예 밭을 만들거나 축사를 짓기도 했다. 과거 다랑이논을 밀어버리고 집을 짓는 사람도 많다. 현재 다랑이논 위에는 축사 4곳, 집 10채가 자리 잡고 있다.

대부분 다랑이논은 농사를 짓지 않고, 수년째 묵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과거 마을 뒷산에 올라 바라보면 계단식 논이 그림처럼 펼쳐졌지만 지금은 아예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됐다.

어린 시절 하씨는 논과 논 사이에 흐르던 봇도랑을 정비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봇도랑은 보의 물이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며, 이 마을 사람들이 수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과거 마을 뒷산에 보를 설치한 뒤 다랑이논에 물을 대기 위해 도랑을 파면서 생긴 이름이다.

봇도랑도 다랑이논과 함께 허물어지거나 사라진 지 오래다. 또 봇도랑이 자주 허물어져 1980년대부터 봇도랑에 파이프를 묻어 흙을 덮어버린 곳도 늘고 있다.

◇농업유산 지정 위해 보존 시급=무등산 자락을 끼고 있는 달구리 마을은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되는 등 자연 환경이 빼어나다. 아직도 낮은 돌담이 좁은 골목 따라 이어져 있고, 맑은 물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한 때 이곳은 150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50가구 정도가 모여 있다. 대부분 그나마 남아 있는 다랑이논에서 논농사를 짓거나 보리콩, 율무 등을 재배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곳 다랑이논은 6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남도와 화순군이 달구리 마을 다랑이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보에서 논으로 물을 연결하는 봇도랑의 특성 때문이다. 산비탈 논에 만들어지고, 대부분 논이 20평 내외로 작아 붓도랑의 길이는 최대 10㎞에 달한다.

또 주변에는 소나무 숲과 편백나무 숲이 자리 잡고 있고, 유채꽃과 구절초 군락 등 자연환경이 잘 보존돼 있다. 세계중요농업유산 선정 기준인 생물다양성이 충분하다.

화순군은 붓도랑과 다랑이논을 보존하기 위해 주민 112명으로 꾸려진 마을보존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붓도랑과 다랑이논의 훼손이 심해 농업유산 지정 추진 전에 적극적인 보존 노력이 우선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광주일보 오광록·조성수 기자, 사진 김진수 기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