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 이기(利器)로 '정신적 아름다움'을 많이 상실하거나 간과하며 살고 있는 요즘, '봄의 전령사'같은, 가슴 찡한  사랑이야기를 만나본다.

그대 없는 세상에 남긴다
-잔 에뷔테른의 유서-

이젠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네요
달콤한 잠 한번 자보았음 좋겠어요
영광은 비참함 뒤에 오는 것이라고
속악(俗惡)과 지고(至高)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우리는 모두 어둠 속에서 태어나
밝음 가운데 죽어가지요

딱 한 차례의 개인전
피를 토하면서 그린 그림들이
풍기 문란하다고 철거 명령을 받아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죠
그게 운명이라 그이가 다시 피 토할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몽파르나스(Montparnasse)의 잿빛 포도(鋪道)를 달려
술을 사오는 것

쾌락의 지옥이여
너와도 이제는 결별이구나
악마는 나에게 와 키스해다오
그리고 뱃속의 아기야
너와도 이제는 이별이란다
너는 엄마 얼굴도 보지 못하고
흉측한 빚더미의 이 세상을 향해
한번 울어보지도 못 하고 죽겠구나

“이따리아! 까―라 이따리아!”
오오, 신이시여
악마도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내게 돌려주소서
사랑했던 그 사람을
사랑이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됨의 길을 가르치는 과정이 아닙니까
더운 영혼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아닙니까

불 없는 아틀리에에서
굳은 빵도 떨어진 식탁에서 그이는
그림을 그렸지요
마시고 싶다, 저 햇빛을
마시게 해달라고 외치면서 화폭에다
핏빛 생명을 토했지요
안고 싶다, 저 태양을
그리운 남국의 태양을 한번만 더
안게 해달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잔 에뷔테른

▲모딜리아니

■사랑을 잃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긴 목과 단순화된 얼굴에서 풍겨지는 한없는 애수와 슬픔……. 차갑고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우아하고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의 그림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길고 서글픈 목덜미의 여인은 남편을 따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의 아내 잔 에뷔테른이다. 모딜리아니의 불꽃 같은 예술혼은 너무 빨리 타올라 35세를 일기로 한줌의 재가 되었다. 그런 모딜리아니를 너무나 사랑하여 죽음까지도 함께한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 두 사람의 사랑은 가난한 가운데서도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지방 소도시에서 유태인 소매상의 아들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릴 때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포기하고서 그림을 그리며 성장기를 보낸다. 이탈리아의 큰 도시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그림 공부를 한 뒤 예술의 도시 파리로 간 것이 스물한 살 때였다. 청운의 꿈을 안고 온 파리에서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다. 모델료를 안 줘도 되는 뒷골목의 여인들과 하녀들이 가난한 화가의 모델 노릇을 해주었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며 그린 그림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몇 점 팔리지도 않았다. 실의에 빠진 모딜리아니는 술에 절어 살아갔다. 보살펴주는 가족도 없던 터라 그의 건강은 가난과 과로, 술과 진통제로 나날이 나빠져 갔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그는 어느 화상(畵商)의 도움으로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1917년이었다. 그런데 쇼윈도에 내건 두 점의 누드화를 먼저 본 사람은 그 구역의 경찰관이었다. 경찰관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당장 그림을 철거하라고 했다. 개인전을 연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철거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이 모딜리아니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개인전이었다. 화가가 자신의 생애에 단 한 번도 대중 앞에서 제대로 전시회를 열지 못했으니, 이보다 불행한 일이 있으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에 그의 불행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바로 그 무렵 모딜리아니는 잔 에뷔테른이라는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잔은 화가인 오빠가 나가는 미술학원에 따라가서 그림 공부를 하던 상류층의 아리따운 처녀였다. 학원 수강생들은 공부가 끝나면 찻집에 몰려가 수다를 떨기도 했는데, 잔은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미소 띤 채 귀기울여 듣기만 할 정도로 숫기가 없었다. 잔으로서는 이미 화단에 나가 활동하고 있는 오빠가 친구들을 데리고 미술학원 근처의 찻집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 더없이 큰 즐거움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찻집에서 몇 번 만난 친구의 동생을 보고 사랑에 빠져버렸다. 아름다운 금발에 귀여운 이마, 이마를 덮은 짧고 풍성한 머리카락……. 모딜리아니는 잔에게 ‘야자열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모딜리아니의 순수한 사랑은 잔의 마음을 열게 하였고, 두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갔다. 두 사람은 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3년여의 기간 동안 모딜리아니와 잔은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크게 기뻐하고 가난에 아파했다. 모딜리아니는 잔의 초상화만 20여 점을 그리면서 고결하고도 순수한 미적 승화를 이뤄냈다.

그림을 그린 이는 모딜리아니였지만, 모딜리아니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이는 잔이었다. 잔의 헌신적인 사랑에 힘입어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꽃을 활짝 피웠다. 그림은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색채는 더욱 섬세해졌다.

그러던 그들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모딜리아니가 폐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당시 폐결핵은 불치병이었기에 아기는 이탈리아의 친척한테 보내졌다. 사랑하는 아기를 볼 수 없음에, 자신으로 인하여 천사 같은 아내가 고생하는 모습에 절망한 모딜리아니는 더더욱 술을 찾게 되었다.

잔은 사랑하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때로는 빵을 사서 새벽길을 달리고 술병을 들고서 밤길을 달렸다. 술과 그림밖에 모르는 남편을 위해서.

공기 좋은 지중해 연안으로 이사도 가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날로 악화될 뿐이었다. 잔이 친정에서 돈을 빌려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피를 토하면서 그린 그림은 그들의 생계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였고,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파리로 되돌아온 모딜리아니는 가까운 친구들의 초상화를 열심히 그려 나갔다. 죽음을 예감하고서 이별의 선물을 준비하는 남편의 모습을 잔은 숨죽여 울며 지켜볼 뿐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바로 그 다음해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결핵성뇌막염으로 자선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이탈리아!…… 그리운 이탈리아여!” 이 한마디를 남기고서. 만삭의 잔은 남편의 시신에 오래도록 입을 맞춘다.

다음날 아침, 잔은 부모가 살고있는는 6층 아파트로 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삽시간에 거리에 울려퍼지는 비명과 아우성. 왜 그녀는 출산을 기다리지 않고 목숨을 거둬들였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의 허무함을 잔은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너무도 사랑했던 남편 곁으로 그녀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페르 라세즈(Père Lachaise) 묘지에 같이 묻혀 있는 두 사람의 사랑을 운명의 신(神)인들 방해할 수 있으랴.

힘겹게 부부가 된 두 사람은 그렇게 짧은 사랑의 궤적을 그렸고,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승하 산문집 『빠져들다』에서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 에뷔테른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