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리에 내리면 마중 나갈게요.’
인터뷰를 위해, 화백의 시골 작업실 겸 농장 위치를 묻는 기자의 휴대전화 속으로 들려오는 老화백의 목소리는 문인화의 굵은 붓 터치를 닮아 있었다. 병아리 빛 따스한 겨울햇살이 내리던 화순오일장날, 약속한 원지리를 찾았을 때 정류장 옆 논길에서 차 경적을 울리면서 화백은 처음만나는 기자를 반겼다.

▲둔전 김병숙(屯田 金丙淑)화백

∎만인리의 농부화가

다양한 호수의 많은 붓들과 물감들이 조금은 어지럽게 놓인 화백의 작업실엔 새끼 밴 강아지를 들여놓은 탓인지 물감냄새 대신 강아지 냄새가 났다.

‘난 허백련 화백 슬하의 연진회에서 그림공부 한 거 빼고는 스승도 없고 혼자서 그림을 그렸어요..그래서 후학(後學)도 없고,,,’ 조금은 쓸쓸함이 느껴질 법도 하는 그의 대화 행간과는 달리 화백의 표정이나 말투는 스스럼없고 당당하다.

조용한곳에 살고 싶어, 공직생활에서 물러난 16년 전에 화순으로 들어와, 1200여 평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그리며 사는 스스로를, 화백은  ‘이모작(二毛作) 인생' 산다고 말한다.

▲화백의 그림도구들

∎그림 그리는 경찰관

화백의 전직(前職)은 의외로 경찰관이다.
어린 시절 추억도 그림 그리는 취미 외에는 거의 기억에 남는 게 없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성년(成年)에 이르러 경찰공무원 생활 하면서도 그는, 언제나 시간을 내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내근(內勤)이나 사무를 보는 한직(閑職)을 택했다 한다.

낮에는 근무하고 밤이면 그림을 그렸는데 늘 시간에 쫓기는 생활이었다.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직이 아무리 조용한 부서(部署)라 하더라도 창작을 하는 작가에게는 넉넉한 시간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은 경찰본연의 업무도 게을리 하지 않아 1998년 정년퇴임 時, 직무에 정려(精勵)하여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되는 옥조근정훈장(玉條勤政勳章)을 수훈했다.

▲그림그리는 화백

∎화백이 택한 사군자(四君子)란,,,

화백이 그림을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부터 막연하게 좋아서 그린 그림. 그는 사군자(四君子)를 택했다. 사군자를 택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도 화백은 ‘그냥 사군자가 좋아서,,’라고 단순하게 대답한다.

문인화의 대표적인 화목으로 화훼화(花卉畵)의 일종인 사군자는 수묵(水墨) 위주로 그려진 매화(梅花)·난초(蘭草)·국화(菊花)·대나무[竹] 그림의 총칭이다. 문사들이 이들 소재의 식물적 장점을 고결한 군자의 인품에 비유하여 즐겨 그렸다. 특히 식물의 가장 커다란 생존적 고난인 추위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이들의 생태적 특성은 유교적 인륜의식과 결부되어 변함없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널리 애호되었다. 그리고 사군자는 다른 소재에 비해 형태가 간결하고 서예의 필획을 이용하여 쉽게 다룰 수 있어 더욱 성행했으며, 서예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둔전(屯田)이란 자신의 호(號)도 화백의 고향인 돌산갓김치의 본고장 여수 돌산 둔전(屯田)마을 명(名)을 따서 스스로 지은 거처럼 매사가 무념무상(無念無想), 자존감을 외면적으로 표출하지 않으면서 자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결코 놓지 않는 자유인(自由人) 老화백은 사군자의 정의(定義)와 많이 닮은 화가라는 생각이 든다.

∎문인화(文人畵)의 대가

사군자로 시작하여 인고의 세월 끝에 탄생한 화백의 작품들은 국전을 비롯한 각종 전국대회에서 연이어 수상하고, 지금은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부문(미협)초대작가이자 심사 및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문인화의 대가(大家)에 이르렀다.

시(글).글자(서예) 그림(화)이 나타나 있는 것을 문인화 라고 하는데 문인화는 화려하고 정교한 기법보다는 문기(文氣)와 서권기(書卷氣)가 깃든 간일(簡逸)하고 소박한 수묵화법을 진작시키며, 시나 서예와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여 시화일치(詩畵一致) 또는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경지와 시·서·화를 모두 능숙하게 구사하는 3절(三絶)의 상태를 지향한다.

화백은 질곡(桎梏)의 인생여정들을 자신의 그림과 글로 표현하며,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모든 말을 대신한다. 심지어 인터뷰 기사와 함께 게재할 화백의 작품들도 ‘보는 이’의 시선으로 작품을 느끼라면서 작품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렇듯 고고한 화백은 상업적 의도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리는 ‘그림 좋아하는 화가’로 남기를 바란다.

∎이모작(二毛作)으로 보내는 노후생활,,

화백은 지금 친환경 저농약 포도를 재배하는 농사일을 하고 그림도 그리며 스스로 ‘이모작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강아지를 예뻐하는 화백은 강아지들을 기르면서 새끼 낳으면 분양하여 용돈도 번다고 하면서 웃었다, 순수하면서도 실용주의적인 사고(思考)를 지닌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화백은 여가를 이용하여 초등학생들에게 방과 후 토요 미술 지도를 하고, 화순문화원에서 성인 대상으로 사군자도 가르치는데, 모든 교육이 그렇듯 미술교육도 기초가 중요하다며 그림그리기 기초만 탄탄하면 독자적으로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미술이 창의력과 추상력을 요구하는 예술이므로 천부적인 재능이 따라주어야 함은 필수적이다.

일하는 사람은 하루가 금방가고 노는 사람은 하루가 지루하다.

평생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며 성실(誠實)‧근면(勤勉)정신으로 살아온 둔전(屯田) 김병숙(金丙淑)화백의 노후는 지금도 그렇게 ‘이모작(二毛作’)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모작(二毛作) 인생 김병숙화백

둔전 김병숙 화백: 010.3000.7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