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릿재를 넘어가면 청정화순과 멀어지면서 도시 내음이 물씬 난다.

겨울 한기(寒氣)가 일광(日光)에 스며있는 날,
서예가 송파(松坡) 이규형(李圭珩)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도심(都心)에서 묵향(墨香)을 맡는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지면서 왠지 초조했다.
선생에 대한 인품과 명성을 미리 들었기 때문일까..

▲송파(松坡) 이규형(李圭珩)선생

∎삼락(三樂)서예원에서 선생을 뵙다.

광주 대인동에 소재한 삼락서예원은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삼락서예원은 진덕법고지신(進德修業法古知新 - 덕 있는데 나아가 업을 닦고 옛 선현의 가르침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알아야 한다)을 강목삼아 지금까지 서예인구의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한약재 같은 묵향(墨香)이 코를 찌르는 이 서예원에서 선생은 지금도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미 배출한 제자들 중에는 도전(道展), 시전(市展) 초대작가들만도 30여 명이 된다.

1937년 화순군 이서면 안심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부모로 부터 한학(漢學)을 배웠고 한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글씨를 쓰게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 간 마을에서도 글씨공부를 했는데 나라가 어려울수록 정신이 바로서야 한다는 부모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렇게 글씨를 쓰다 보니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1969년 광주로 나와 송곡 안규동 선생에게 사사하여 서예 원필법(圓筆法)을 배웠고, 그 이후 45여 년 간 서예가의 길을 걷고 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선생이 좋아하는 작품

∎서예를 하려면 인품이 우선되어야,,,

선생은 제자들에게 창작에 몰두한 나머지 지나치게 개성을 드러내는 일은 삼가해 주었으면 한다. 서예라는 것이 옛것을 먼저 배워 차고 넘칠 정도가 되면 자연적으로 개성이 나온다고..그 때 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좋은 서예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서예는 좋은 인품을 갖추어야만 좋은 서예를 할 수 있고, 좋은 인품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전(古典)공부를 먼저하고 섣부른 욕심을 앞세우지 말라고 강조한다.

∎박약회 활동

현재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화순 박약회(博約會)에서는 지금도 매월 한 번씩 수련을 하고 있다.

박약회(博約會)는 博文約禮(널리 학문을 닦고 예절을 잘 지킴)의 준말로 화순향교, 능주향교, 동복향교 유림들이 향교(鄕校)를 보존하려면 우선 유림들이 먼저 인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취지로 조직되었는데, 퇴계 이황선생의 사상이념을 연구하는 모임이라고 한다.

박약회의 수련방법은 회원 자체 한문강사 지도하에 경서(四書三經)를 공부하고, 사회상식을 알기 위해서는 분야별 강사를 초빙하여 수강을 하고있다.

서예의 대가(大家)이면서도 아직도 공부하는 마음자세를 지닌 선생이 새삼 존경스럽다.

▲선생의 제자들과 함께

∎서예의 보람

선생은 서예 하는 보람으로 후손대대 자신이 쓴 글씨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라고 꼽는다.

서예 서체(書體)는 예서(隸書), 해서(楷書), 전서(篆書), 횡서(橫書), 초서(草書) 5체(五體)가 있는데 선생은 5체를 모두 쓰고 한글도 쓴다. 글 내용의 성격에 따라 서체를 선택하는데 선생이 특별히 선호하는 서체는 없고, 일반인들이 횡서(橫書)를 좋아해서 횡서를 많이 쓴다고 한다. 그리고 큰 비석(碑石)을 쓸 때는 정자(正字)인 해서(楷書)를 사용한다.

화순 적벽의 ‘망양정’ 현판과, 보성 대계서원 복설사적비(大溪書院 復說事蹟碑), 칠송서원 충현사 묘정비(廟庭碑), 이서면에 있는 하백원 선생(실학파) 유적지 유래비는 선생의 작품이다.

▲칠송서원 묘정비

∎앞으로의 소망과 포부

선생은 앞으로 더 훌륭한 글씨를 쓰고 싶다고 소박한 소망을 털어놓았다.
또한 좋은 서예가는 주위의 평판이 좋아야하고 사후(死後)에 숭배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더하여, 서예라는 것이 단순하게 글씨만 쓰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인생 공부가 들어있으니 후학들이 공부를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한다.

고희(古稀)를 맞아 첫 개인전을 열만큼 본심이 겸허하고 조급함이 없는 선생은 오늘도 문자(文字)로 자신만의 소우주(小宇宙)를 형상화 시키고 있다.

길지 않은 인터뷰에서 묵향(墨香)에 숨어있는 선생의 고매한 인품이 전해졌고, 처음 뵈 온 선생이 기자에게 오래 된 지인(知人)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