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일권 작가.

처음으로 수완지구에 가보았다. 너무 조용해 사람의 그림자도 없어 보이는 오전이었다. 그동안 가보았던 작업실 중, 최상의 상태였다. 고급스럽고 풍성하다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의 효율성이 최상이라는 얘기다.

너무 조용했고 서늘한 기운을 감쌀 수 있을 만큼의 햇살도 들어왔다. 굳이 산 중으로 들어가 목탁을 두드리지 않아도 무엇인가에 극도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

시간이 이대로 흐른다면 작가의 말처럼 “천천히 느리게 지금처럼 걸어간다면” 아마도 곧 다가오는 시간에 작가의 해맑은 건강한 웃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벽에 켜켜이 기대어 있는 크고 작은 캔버스와 액자들은 작가가 아직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붉은 빛 선연한 피톨들이 색의 유전자를 만들고 있음을 가늠하게 한다.

중국 북경에서 광주로 옮겨 온 나만의 작업들

▲ 윤일권 作「유희도-물총새」

작가는 “외도를 너무 많이 해서 내 색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1993년 북경으로 갔던 그가 돌아 온 때는 2003년 정도이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하고 그림만을 위해 중국 북경 소재의 중앙미술대학에 진학했고 한·중 수교의 물꼬가 막 터지기 시작한 우리나라 1호의 중국 유학생이기도 했다.

“웃기는 일도 많았다. 예전의 안기부에서 정신 반공교육까지 받았던 시절이니까”로 말을 꺼낸 작가는 꿈을 꾸듯 북경에서의 시절들을 이야기한다. 현재 중국 내의 유명해진 작가들은 거의 다 그때 같이 공부하던 작가들이라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더구나 중국의 798 예술특구 지역을 이야기 하며 798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들려준다. 전혀 알 수 없었던, 그 지역에서 거주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1995년, 중앙 대학이 북경에서 798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교사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전 흑백TV공장이었지만, 현재는 비어있는 공장을 발견했고 거기에 대학생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현재의 798 예술특구를 이끌어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1996년 졸업한 작가는 그곳에서 3년을 더 머물며 문화재관리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다시 돌아온 광주, 나만의 색을 찾으려

▲ 윤일권 作「유압도」

2006년 광주 시립미술관이 운영하는 창작 스튜디오에 자리를 잡은 작가는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가지고 있던 모든 작업들을 행했다. 관심의 대상이었던 민화, 산수, 옻칠화, 세밀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제 작업의 방향조차 찾아내지 못한 상태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며 “하고 싶은 작업들을 멈추지 않고 하나씩 해내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해내는 마지막의 정점이 반드시 올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 한다.

작가가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해오면서 얻은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들이다. 그림 관련한 일을 진행하면서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 많은 각 국 나라의 그림들을 보았고 관련 사람들과 인맥을 넓혔던 것이 결국은 자연스레 자신 스스로에게 녹아들어 다시 그림으로 살아낼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품 소장가들을 찾아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상당량의 작품들을 접했지만 정작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내가 작품이론가(감정가)가 아닌 작가라는 현실을 깨달아갔다. 전통계승을 바탕으로 한 한 단계 발전시키는 화가나 이론가들의 목적은 분명 하나다. 수묵은 전통을 떠나 현대회화의 재료로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말한다. 분명 자기만의 색을 찾아내는데 많은 장점을 충분히 갖고 있다.

▲ 윤일권 作「운주사」

운주사와 설중유화도에서 보여주는 어눌한 우리만의 미학

민화는 우리만의 그림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우림 민족 고유의 문화이고 정서다. 작가가 만들어 낸 민화는 우리 민족의 감성에 작가만의 감성을 덧입힌, 보는 사람들의 편안한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단순한 선, 오래되어 빛이 바랜듯한 색들, 어눌하게 표현되어 있는 메시지 전달 등이 단순하면서도 강한 울림으로 자연스럽게 우리들에게 와 닿는다.

<운주사> 시리즈는 지금껏 많은 작가들이 다루었던 소재이지만 반대로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영감을 많이 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북두칠성과 둥근 탑이 주조로 그려진 ‘유희도-운주사’는 누워있는 와불과 벽에 기대선 부처들이 보인다. 온통 아직은 미명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지만 와불이 일어서고 찬란한 아침의, 새 세상이 오기를, 구부려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산꼭대기 간절한 마음이 보인다.

‘유희도-1’에서는 흐르는 물과 나무, 다리, 집들이 보이고 이곳 역시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산 아래 먼 곳을 바라보며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작가의 그림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있다. 일어서지도 않고 달려가지도 않는다. 정제된 시간을 기다리는, 다리를 일으켜 걸으려 하는 작가와 닮았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문의 : 017-605-6008

▲ 윤일권 作「유희도」

프롤로그

깃발을 보면 / 깃발처럼 마구 심장이 펄럭이던 // 때가 있었다. / 바람에 / 깃발이 펄럭펄럭 구겨지듯 / 나의 심장 또한 구겨져서 // 푸르고 싱싱한 모습으로 휘날리고 싶었던 / 때가 있었다. 그때 / 나는 먼 길을 떠나는 젊은 강이었다 // 오늘도 파아란 하늘 높다란 장대 끝에서는 / 전신을 몸부림치듯 / 깃발을 펄럭인다. 그러나 // 나는 지금 양탄자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 조용한 심장을 지녔을 뿐이다 // 내 눈빛 속에 깃발은 / 분명 힘차게 요동치지만 / 예전처럼 나의 심장은 숨 가쁘게 휘날리지 않는다 // 나는 이미 저무는 바닷가에 닿았거니와 / 오랜 세월 깃발은 / 자주 나를 속여 왔으므로. - 이수익作. <깃발은>

그냥 그대로 죽고 싶을 때가 있다. 더 이상을 바라지 않을 시간, 더 이하를 바라지 않을 시간에 그대로 멈춰, 꽃잎처럼 하르르 마르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이 드니 고집 밖에 없다. 고목에 핀 웅두리처럼 몹쓸 인상으로 굳어져버린 저만의 자폐의 공간, 독거하는 심술이 대창처럼 푸르고 꼿꼿하다. 가슴엔 비 내리고 옥수수 잎에 바람 일어 웃을 일 하나 없다.

범현이baram@siminso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