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東山) 양용범(梁容範) 화백

한국적 가치관을 모태삼아 화선지나 비단위에 먹을 쳐서 그려내는 한국화. 수묵 산수화, 문인화, 사군자, 화조, 어개… 그러나 기존의 화법을 버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한국화를 그려내고 있는 동산(東山) 양용범(梁容範)화백. 남면 사수리2구 두강마을의 동산화실은 그에게 있어 관념탈피를 위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곳이자 독특한 화풍이 꽃을 피우는 곳이다.

한국화를 재조명 한다
동산 양용범 화백은 한국화가 흐르는 물처럼 시대에 맞게 변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독자와의 소통은 그에게 있어 가장 큰 화두였다.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시대의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문제는 그에게 많은 고민과 갈등을 안겨주었다.

“화가의 언어는 그림이다. 그 언어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보여줄 것인가가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이 문제는 지금도 과제로 남아있지만 앞으로도 풀어나가야 할 나의 짐이기도 하다.”

양 화백은 초창기에는 전통한국화의 관념에 충실한 화가 중 하나였다. 그러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영향을 받고 이후 독학을 거쳐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다. 주위와 타협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세월이 그 만의 새로운 장르와 형태들을 만들어냈다.


색을 죽여야 색이 산다
화실을 가득 메운 그림들이 처음엔 낯설게 다가오다 이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 무채색과 유채색의 조화. 담백한 무채색은 정갈한 색들을 강렬하게 살아나게 한다. 자신이 가진 색을 죽이고 낮게 더 낮게 몸을 숙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선 꽃이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다닌다.

나팔꽃 / 10호 / 수묵·채색 / 2008년 作

사물의 세부적인 모습들을 극도로 생략한 추상화풍의 그림도 그 만의 특징이다. 작가의 한국화에서 서양화의 냄새가 짙게 배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두강마을 입구의 당산나무를 소재로 그린 2005년작 축제에서는 갈매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 표현방법에 있어 진일보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화실앞 마당 너머 보이는 당산나무는 나의 좋은 그림 소재이며 영감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농사를 지었던 밀레가 이삭줍기라는 명작을 만들어냈듯 잠들었던 감성을 깨우는 소재는 언제나 주위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축제 / 20호 / 수묵·담채 / 2005년 作

양 화백은 한국화로 그려내기 가장 난해하다는 정밀화에도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뽐냈다. 1987년작 모과에서는 표현의 벽을 허물고 한국화의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작가를 만날 수 있다.

혹자들은 그를 두고 한국화에 서양화를 접목시켰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오직 자신을 그릴 뿐, 사람들이 정해놓은 장르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모과 / 10호 / 수묵·채색 / 1987년 作

그림은 환경에 따라 천의 얼굴을 나타낸다
주암호 상류, 남면 사수리 두강마을에 터를 잡은 동산화실. 쾌적한 자연환경에 둘러쌓인 이곳은 지금까지의 그를 잊고 새로운 그림세계를 만들 수 있게 한 창작의 산실이다. 제주가 고향인 작가는 처음엔 서울생활을 뒤로하고 광주로 내려와 금남로에 화실을 차렸다고 한다. 71년을 시작으로 수없는 개인전을 열고 40여명의 후학들을 가르치며 치열하게 산 것도 이즈음 일이다.

그러다 20년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지금의 화실로 옮긴 때가 1992년. 18년전의 일이다. 시골 한적한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과 첫눈에 반한 화순의 전원풍경이 그로 하여금 허름한 농가를 뜯어 고쳐 화실로 바꿔놓게 했다.

“당시만 해도 시내권에서 다들 못 벗어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모든 걸 떨쳐버리고 이곳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뭐랄까. 내 인생의 큰 전환점 이였던 것 같다.”

동산화실 앞 마당에서…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림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경이 굳어 있던 오감을 자극하고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던 그의 머리를 흔들어 깨웠다.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그제서야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다난했던 그림 외길 50년
작가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태어나서 다른 일에 눈을 돌려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림 공부가 어려웠던 이유도 있었지만 매력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면서도 난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독, 희열, 슬픔 등이 그림 속에 스며들어 만감이 교차할 때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양 화백은 많이 보고 여러 경험들을 해보는 것이 큰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유 될 때마다 해외로 돌아다니며 수많은 스케치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머리에 쌓인 낡은 생각들을 비워내고 또 비워냈다. 머리가 텅 비어있을 때 붓을 잡아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는 것이 작가의 지론이었다.

꿈의 나래는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내년 일본·대만·중국·파리·서울을 잇는 5개국 순회 전시전을 계획하고 있다.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더 큰 세상의로의 도약을 멈출 수 없는 이유에서다. 한국작가 20명과 터기작가 20명이 참여하는 ‘광주이스탄불 현대미술교류전’에 출품할 200호 규모의 작품그리기에도 여념이 없다.

“음악 하는 사람은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야 하지만 화가는 시각적으로 환희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그림 그리는 사람의 의무이다. 감동받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무리 자신의 세계가 훌륭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그의 말에서 50년 외길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다. 1962년 본격적으로 한국화 공부를 시작해 지금까지 300여회가 넘는 단체전과 7회의 개인전을 치러 낸 동산 양용범 화백. 현재는 광주시립미술관 이사로 활동하며 동산화실에서 왕성한 그림인생을 펼치고 있다. 들꽃을 가꾸고 차를 마시며 그렇게…

남면 사수리2구 두강마을에 위치한 동산화실 입구

양용범 화백의 창작 산실인 동산화실. 허름한 농가를 사들여 개조했다.

생생하게 다가오는 작품들

모란 / 20호 / 수묵·채색 / 2003년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