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숙(72) 선생

한폭의 그림에 시(詩), 서예(書藝), 그림(畵)이 서로를 어루만지며 멋들어진 조화를 이뤄내고 있는 문인화. 그림에는 그리는 사람의 멋과 품격이 드러나 있다고 했다. 단아하면서도 대담한 그림으로 정평이 나 있는 둔전(屯田) 김병숙(72) 선생. 작가 안에 무엇이 그런 그림을 만들어내는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다.

그의 집이자 작업실이 있는 능주 만인리를 찾아가는 길이 따뜻하다. 날씨 때문이 아니다. 언젠가 군청 민원실에서 보았던 분홍 진달래그림의 주인공을 만난다는 생각에서다. 그 그림을 보며 처음엔 분명 여인의 손에 그려졌을 거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여인의 감성이 깊이 배어있는 사람일거라고 상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대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아주는 이는 나이 지긋한 시골 할아버지였다. 연륜 때문인가. 포근한 느낌이다.

그림에 대한 감성은 세월도 비켜간다
평범한 살림집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작업실에 들어서자 예의 화폭에 담긴 진달래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느낌. 화려한 색감에서 향기마저 전해진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여인의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에서 그는 붓을 잡은 이의 마음이 중요할 뿐 나이는 상관없음을 보여주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 마음에도 분홍진달래 한 다발 씩 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김병숙 선생은 전남 여수 출신이다. 여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경찰직에 뛰어들어 98년 정년퇴임 때까지 공직에 몸담았었다. 그러나 경찰로만 남아 있기엔 뭔가 부족했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수시로 붓을 들었던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70년대 중반 의재 허백련 선생의 제자들이 세운 연진회 미술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낮엔 일하고 밤에 학원을 다니며 그림에 대한 갈증을 풀어 나갔다. 보통 붓을 잡는 나이보다 한창 늦은 그의 나이 삼십대 후반의 일이었다.

“나한테는 스승이 없었네. 그래서 호도 둔전이라고 고향마을 이름을 따서 스스로 지어버렸지. 그라고… 연진회에서 1년 동안 공부한 후론 쭉 혼자 힘으로 그려 나갔는디 그때부턴 순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더구만.”

화조도(花鳥圖)의 대표작인 진달래(20호). 작가의 상상력과 마음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는 일과 그림을 동시에 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냈을 일일 거라는 설명이었다. 특히 밤에 형광등 아래서 작업 할 때는 색감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는 등 애로가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놈의 그림이 뭔지 그 고생을 했는지 모를 일이구먼. 지금 생각 허먼 다 허망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고…”

열정과 고생이 결실을 맺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을 한다고들 한다. 그렇게 인고를 견디고 탄생한 작품들은 국전을 비롯한 각종 전국대회에서 연이어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결과 지금은 문인화에 있어 거장 반열에 올랐을 뿐 아니라 여러 대회의 초대작가로 선정돼 심사를 맡아보고 있다. 그는 초대작가가 되는데만 27년이 걸렸다며 남의 작품 심사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을 내비쳤다.

개인전을 언젠간 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김병숙 선생은 30년이 넘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개인전 한번 하지 않았다. “요새 사람들은 돈을 만들 목적으로 개인전을 하는 경향이 있지. 근데 난 그게 싫어. 솔직히 부담스러운 점도 있고… ”

작품은 뒷전이고 수익에만 열을 올리는 부류로 취급받기 싫다는 것이 그동안 개인전을 미뤘던 이유이자 고집이었다. “괜히 그림이나 팔려는 수작으로 보일까봐 겁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네. 그냥 그림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으면 그만이지 뭐 있겠나.” 지금도 2층 작품실엔 40여점이 넘는 그림들이 빛을 못보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화조도(花鳥圖)의 하나인 해오라기(10호)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들은 틀에 짜인 답답한 화랑 대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공서 등에서 수없이 지나는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있다. 어렵게 그린 그림을 팔지 않고 기증을 한 덕분이다.

화가에서 포도농으로
그의 집 뒤편엔 천평 규모의 포도농장이 있다. 아내와 결혼한 두 딸, 아들이 있지만 농사일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아내는 몸이 약하고 아들은 취업준비에 바쁘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거랑 그림 그리는 거랑은 똑같은 것이야. 손에 호미를 들었냐 붓을 들었냐의 차이일 뿐이지.” 땀에 대한 결실을 맺는다는 점에선 세상 모든 일들이 다 똑같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김병숙 선생은 그림이 좋아서 붓을 들뿐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파는 전업작가는 아니다. 굳이 판다면 지필묵 값정도만 받을뿐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림에는 작가의 기분을 흠뻑 심어 넣어야 진짜 명물이 나온다는 그의 말이 돌아오는 내내 귓가에 맴돈다.

떠나는 차를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드는 선생에게서 따뜻한 정이 느껴지는건 어줍잖은 감상의 나부랭이일까. 그러나 그의 작업실에서 맡았던 묵향 만큼은 기계음으로 가득찬 차안에 흥건이 젖어오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림… 그건 아무나 하는게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의 한편을 희생해야만 가능한 힘든 싸움 그 자체였다.

여섯폭 사군자. 문인화는 시(詩), 서예(書藝), 그림(畵)이 조화된 것을 말한다.

팔폭 매화도

달과 어우러진 매화도. 달을 포함한 흰색 부분은 채색하지 않고 빈공간을 살려 표현한것이다

아직 미완성의 작품.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화조도(花鳥圖)이다. 빈 여백에 시(詩)와 서예가 곁들어지면 문인화가 완성된다.

김병숙 선생의 자택이자 작업실. 이곳이 바로 그의 창작 발전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