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미술관 이판석(66) 관장

화순읍에서 차를 달려가다 보면 남면 다산리에 박할아버지 이판석(66) 관장을 만날 수 있다. 거리로는 20km, 시간은 대략 20분 내외다.

이 관장은 재주가 참 많은 사람이다. 2001년 개관해 2006년 전라남도 1종 3호 미술관으로 등록된 다산미술관의 관장답게 한국화에 있어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것은 물론 박 공예(표주박, 곤봉박 등 말린 박 표면위에 열을 가해 그림을 그려 넣는 공예)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단순히 박 위에 붓으로 색을 칠하고 도구를 이용해 그림을 새겨 넣는 기술적인 문제와는 또 다른 부문이 있기에 가능했다. 바로 이 관장의 박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다. 현란한 손재주를 떠나 진정으로 박을 좋아하고 박을 온 세상에 퍼트리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이 그의 박 공예 작품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내 고향 다산리 마을에 박을 키우고 그 박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이 관장은 2007년부터 작년까지 연이어 2년 동안 박축제를 개최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게 하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8월 30 ~ 9월 30일 까지 이어진 작년만 해도 7천여 명의 관람객이 찾아와 주렁주렁 달린 박을 보고 만지고 즐거워하며 돌아갔다. 여기에 방명록에 주소를 남긴 3천여 명에게는 5종의 박 씨앗을 약봉지에 넣어 박씨를 전국에 퍼트리고 싶다는 이 관장의 뜻을 실어 보냈다.

“축제를 열고 씨앗 보내고 하느라 비용 면에서 만만치 않았지만 힘닿는 데로 박씨를 보냈는데 많은 사람들 한테 고맙다는 연락이 왔어요. 참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마음들이 눈 녹듯 사라졌어요.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큰 보람으로 다가 옵니다”. 이 관장은 앞으로도 3회·4회·5회… 계속해서 박축제를 열어 박을 알리고 다산리를 알리고 내 고향 화순을 알리고 싶다 말한다.

“참 잊을 뻔했는데 다산리에 오시면 흥부네집도 있고 마음씨 고약했던 놀부네집도 있어요. 옛날이야기 속의 흥부네 놀부네도 구경하고 초가지붕에 매달린 박도 구경하면 그만일 텐디… 아, 그리고 덤으로 다산미술관도 구경하고요(웃음)”. 이 관장이 말하는 흥부네 놀부네 집은 다산미술관 초입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 권성징악과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한 제비의 보은을 되새기라는 뜻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올해 열리는 3회 박축제가 여름 끝자락부터 가을 초까지 열려요. 참 그때는 박 열린 모양이 장관이요. 와서 사진도 찍고 아이들 구경도 시켜주면 체험학습에도 그만이지요”

박공예 - 박을 삶아 말린 후 인두질로 태워가며 그림을 새겨 넣는다

이 관장은 남은 생은 어린이를 위해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남다른 어린이사랑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인데도 현재 사평중학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졸업생들에게는 손수 그린 그림들을 액자에 담아 졸업선물로 주고 있다. 벌써 4년째 해오고 있는 이 일은 올해도 17명의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이미 마련해놓았다. 다산미술관 제 2전시실에 가면 17개의 액자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가지런히 놓여 있다.

다산미술관을 세우고 박을 키워 박씨를 전파하는 데는 이 관장의 뿌리 깊은 농촌사랑의 마음이 깔려있다
40여년 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젊은 사람들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황폐한 모습이었다고 이 관장은 말한다. “비록 가난했지만 나고 자랐던 당시의 활기찼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어요. 지금도 35가구 정도가 사는데 64세 할아버지가 막내인 것만 봐도 농촌현실이 얼마나 고령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 관장은 다산미술관을 지었다 한다. 현재 미술관은 단순히 자신의 작품이나 소장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회갑연이나 생일잔치 등을 열수 있게 만들어 놨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60~70대 노인들인데 그분들 사랑방으로 쓰시라고 노래방도 갖췄어요. 회갑잔치도 여기서 하고 생일잔치도 하고, 제가 지었지만 우리 모두의 것이나 다름 없어요”

그러나 이 관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을 주민들에게 사비로 일당을 줘가며 박을 심고 꽃길을 가꿨다. 처음 목적은 자취를 감춰버린 박을 다시 살리고 전국에 박씨를 퍼트려 플라스틱 화학용품에 절어있는 사람들에게 친환경 박을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 개인적인 예술욕심도 살리고 관람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도 제공해 주기 위해 박공예도 시작했었다.

그러나 뭔가 부족했다. 박의 소중함을 알리고 다산미술관을 알리는데서 그치지 않고 시들어가는 고향 농촌을 살리고 싶었다. 소득을 올리면 자연히 살기 좋은 농촌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떠났던 젊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에게 박씨를 나눠주며 휴경지나 집집마다 심게 했다. 여기에는 마을 전체를 박 특화마을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 관장의 포부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어려움이 많고 헤쳐 나갈 일이 만만치 않다고 이 관장은 말한다.

박으로 만든 각종 실용품들. 예술품뿐 아니라 실용적인 쓰임새도 많다고 이 관장은 말한다

“뜻은 있지만 마을주민 대부분이 나이드신 분들이라 진행이 잘 안 되는 점이 있어요. 외부의 어떤 지원도 없이 혼자 힘으로만 할려니 힘에 부치는 게 사실입니다”

올해로 3회째 맞는 박축제. 1회당 1억여 원씩 들어가.....힘들지만 그래도 꿈은 있다
차근차근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먼저 박축제로 물꼬를 트자는 게 이 관장의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마을이 알려지게 돼 지지부진한 현 상황에 큰 전환점을 맞을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다. 그래서 올 8월에 치러지는 박축제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하지만 축제 한번씩 치를 때 마다 1억 원이라는 돈이 고스란히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실정이라 이것도 쉬운 일 만은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있는 농촌현실이 참 안타까워요. 예전에는 활기는 있었지만 가난한 농촌이었다면 앞으로는 잘살면서도 아이들 웃는 소리도 들리는 그런 농촌이 됐으면 하는 게 내 꿈이에요”

흔히들 말하는 잘사는 농촌,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화순군에서는 여러 사업 등을 펼치며 분주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관을 떠나서 사비를 털어 미술관을 세우고 박을 통해 고향마을을 알리는 이 관장의 행보는 희생 없이는 못하는 일이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미술관 이판석 관장은 박 박물관을 세우는 게 또 하나의 꿈이라 말한다. “전국의 박물관 520여개 중 박에 관한 박물관은 전무한 실정이라 새 지평을 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에요. 남은 생을 아이들을 위해 바치는 것도 꿈이고, 농촌마을 살리는 것도 꿈이고 거기다 박물관까지.....(웃음). 그런 꿈들이 내 힘이 아닐까 해요”

다산미술관을 품고 있는 다산리 마을

다산미술관 초입에 서 있는 시비. 선배인 한승원 시인이 글을 짓고 이 관장이 직접 새겨 넣었다

이 관장의 아픔이 배어 있는 다산미술관 전경. 97년 8월 괌으로 향하던 KAL747 여객기가 추락해 탑승자 254명 가운데 228명이 숨졌던 사고가 있었다. 이 관장은 이 사고에서 부인과 둘째아들 부부, 그리고 안사돈 등 일가족 4명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다시 산 목숨이나 다름없어 남은 생은 베풀며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족 보상금으로 나온 돈을 털어 2001년 다산미술관을 개관했다.

다산미술관 내부

이 관장이 직접 그려 사평중학교 졸업생들에게 건네줄 졸업 선물

이 관장은 2005~2006년 ‘주암댐 살리기 초·중학교 포스터대회’를 개최했었다. 당시 입상작들이 미술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마을 주민들의 회갑연 등을 열 수 있도록 노래방기기까지 갖춰진 2층 전시실

앞으로 이룰 꿈이 너무 많다고 말하는 이판석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