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에서 이양을 지나 청풍면을 향하여 산수를 완상하며 가노라면 바른편 산 기슭에서 대비리(大庇里)란 마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마을을 옛날에는 대부동이라고도 불렀으나 이는 대비동이 와칭되어 불렸던 이름일 터 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대비동이라 불렀는데 요즈음은 다시 대비리라고 행정관서에서는 부르고 있다.

대비리란 마을의 칭호는 고려때부터 라고 한다. 고려 제20대 신종때의 일이다.

이 마을에는 김수로왕(金首露王) 의 자손인 김해 김씨가 토호로 위세를 펴고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았다고 한다. 이 마을 김씨 가문에 오막살이 가난한 집에 이팔 소애의 몸으로 곱게 자라고 있는 처녀가 있었는데 면모가 단아하고 말과 행실이 겸공하니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부모에게 효심이 지극한 처녀는 슬기와 부지런함도 범인에서 뛰어났다고 한다. 때는 청화사월이라 꾀꼬리는 짝을 지어 새 봄을 노래하고 못속의 잉어는 황금빛을 자랑하며 물결을 희롱하는 모습은 만상이 약동하는 듯 하였다.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새 봄의 산야에서 나물을 캐던 김씨 처녀는 마을 샘으로 찾아 갔다.

이때, 신종왕께서는 여러 조신을 거느리고 미복차림으로 민정을 살펴보고자 무진의 서석산(무등산) 까지 산렵을 오셨다가 다시 화학산을 향하는 길에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산길을 헤메다가 목이 말라 한방울의 물이 간절하던 차였다.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다가 때 마침 샘터에 나타난 김씨 처녀를 보게 되었다.

신종임금께선 심한 갈증으로 왕실의 법도를 망각하고 친히 샘까지 찾아들어 김씨처녀에게 「 애야, 어서 물 한그릇 올려라! 」 하고 말씀하셨다.

소녀는 그제서야 얼굴을 돌려 왕을 우러러보면서 공손한 태도로 물동이에 있는 바가지로 샘물을 떠서 옆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아 주르륵 몇 잎사귀를 따 물위에 띄웠다.

그런 연후에 물바가지를 왕앞에 바치니 왕께서 괴이하게 여겼다. 「 애야! 네 어찌하여 이 물위에 버들잎을 띄우느냐? 」

「 혹시 급체하시어 병이 되실까 염려되어 그리 하였아옵니다. 」

왕께서는 이 소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시고 버들잎을 불어가면서 천천히 물을 마셨다.
「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
「 ...... 」
「 나는 경기도 개경에서 온 사람이다. 」
왕은 처녀를 치하한 후 바쁜 걸음으로 갈길을 재촉하였다.
산렵과 민정을 골고루 살핀 왕은 개경으로 환궁하였다.
그뒤 왕은 궁중에서도 항상 시골소녀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청초하게 빼어난 기품과 우아함이 넘치는 자태며 버들잎을 따서 물에 띄워주던 그 기특한 지혜가 항상 왕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 참으로 기특하기 짝이 없는 아이로다...... 」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그칠 줄 모르니 남주의 일유가 이처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줄이야 왕께서도 미처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후 왕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어의를 불러 용체를 보살피게 하였으나 병환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허약한 몸으로 정사를 살피기도 어렵게 되니 후사도 걱정이었다.
서둘러 태자에게 선위하고 또 태자비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은 천사만념의 깊은 생각끝에 전라도 능성골 처녀를 마음속으로 간택하고 궁중조회의 자리에서 백관들에게 말하였다.
「 짐의 뜻은 남주의 규수로 간택할까 하니 옛날 능성골 우물가에서 만났던 규수를 찾도록 하시오.」
그뒤 궁벽한 시골의 한 소녀는 마침내 간택되어 궁중법도의 예로써 왕비가 되었다.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꿈에도 생각지 못할 왕비가 태어난 것이다.
왕은 이처럼 짧은 기간에 왕통을 다시 태자에게 선위하였으니 이 마을을 대비가 태어났다고 하여 대비동이라 하고 이 샘을 왕비샘 혹 왕샘이라 하였으나 그뒤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이름에 왕비도 좋지만 계집녀가 붙어 가난하다는 풍설이 나돌아 비(妃)자를 바꾸어 가릴비(庇) 자로 고쳐 대비리(大庇里) 가 되었다.
그뒤 이 샘도 이름을 바꾸어 참샘이라 하였다.
혹 어떤 이들은 남원윤씨 집안에서 왕비가 나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입향선조의 연대가 서로 연결이 되지 않고 사실의 기록도 없이 떠도는 말들이다.
실증이나 고증도 없이 왕비의 집터와 샘물만 남아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