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이서면 소재지에서 내려 장엄한 무등산을 바라보며 한참 올라가노라면 영평리에 이른다.
옛 이름은 영신이라고도 하였는데 그곳에 가서 물으면 삼척동자라도 거의 알고 있는 용소(龍沼)라고 하는곳이 있다.
지금부터 400여년전 어느해 초여름이었다.
만산에 꽃이 피고 녹음짙어가는 4월. 여기저기서 물소리는 유달리 시원스럽게 흐르고 이름 모를 새들이 나무가지로 넘나들면서 지저귀고 화답하는 모습은 속진을 털어버린 산곡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영신 보월의 농부들이 논밭을 갈며 뿌리는데 갑자기 무등산에 구름이 내려 감싸고 남쪽 하늘에서는 검은 먹구름이 북으로 조수처럼 치솟아 올라오면서 오색 찬란한 무지개가 용소와 무등산에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다시 광풍과 더불어 소낙비가 몰아쳐 모든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 비를 피하여 앉아있는데 구름속에서 하얀 백룡이 의연하게 꼬리를 치며 못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신기한듯 이를 구경하며 제각기 입을 열었다.
「 무슨 뱀처럼 생긴 괴물이 저렇게 내려올까?」
「 저게 바로 영물이라는 용인게야.」
다시 하늘에서 비와 구름이 사라지며 맑고 밝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그 못을 찾아가 살펴보았다.
못속에서 용이 물을 타고 상하로 꼬리를 치며 노니 못은 생기를 얻은 듯 넘실거리는데 신기하게도 부근에 있는 모든 개구리와 자라들이 어떻게 모여 들었는지 수백마리가 용앞에 조회나 하는듯이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날부터 마을사람들은 마을에 용이 찾아와 살고 있다고 하여 용신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음식을 정결하게 만들어 바치고 제사를 지내주니 이 고을에는 해마다 우순풍조하여 풍년이 들었고 모두 태평가를 불렀다.
모든 농민들은 이 못가가기를 금기하고 여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 용왕님네...」
하고 물을 바라보며 허리를 굽혀 절을 올렸다.
그뒤 풍류를 즐기는 동복현감이 애첩 비연이란 기생을 데리고 무등산 규봉암으로 소풍을 가다 규봉암이 너무 멀어 수행원들에게
「 이 부근에는 쉬어갈 곳이 없느냐?」
하고 물었다.
이방이 말하기를
「 예, 여기 조금가면 큰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백룡이 살고 있읍니다. 」
고 있읍니다.
하였다.
「 그럼 오늘은 거기서 하루 놀자.」
현감 방향을 바꾸어 그 못을 찾아갔다.
그날도 시퍼런 못속에는 하얀 용이 꼬리를 치며 놀고 있었다.
한참 용을 바라보고 있던 현감은 그곳에 연석을 만들었다.
「 여기에 자리를 펴고 주효를 올려라.」
관기와 더불어 이속들이 현감을 보좌하고 모두 앉아 운자를 불러 시를 읊고 술잔을 좌우로 돌렸다.
관기들이 어부사, 적벽부, 용비어천가, 시조등을 거문고에 실어 타면서 흥겹게 노는데 어느덧 하루해가 서산에 걸렸다.
기생들도 석양노을에 취흥이 진진하여 춤을 추며 여흥을 마음껏 즐겼다.
술기운이 거나해진 현감이 애첩 비연을 불렀다.
「 얘야! 저기 못위에 높은 바위에서 이 칼을 줄테니 칼춤이나 한번 춰볼 수 없겠느냐?」
「 예, 그 어찌 어려운 일이겠읍니까?」
「 그럼 올라가 보아라.」
비연이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높은 바위에 올라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피리, 젓대와 양금등 삼현의 합주곡에 신선이라도 하강할 듯 했다.
비연의 춤은 더욱 관중의 마음을 매혹하였다.
현감도 흥겹게 노는 비연의 춤장단에 따라 일어서 춤을 추었다.
칼을 들고 검무를 오랫동안 추던 비연이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손에 칼을 쥔 채 못으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풍덩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에 있던 백룡이 갑자기 꼬리를 치며 노하기 시작했다.
흡사 바다의 뱃고동같은 소리를 지르며 물속에서 꼬리를 치고 요동을 쳤다.
현감은 놀라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수행원들에게 호통만 치는 것이었다.
비연의 시체를 건져내는 것보다는 백룡의 노한 울음소리에 겁을 먹고 혼비백산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속으로 들어간 비연은 보이지 않고 노기가 충전한 백룡은 물속을 뒤엎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윽고 무등산이 어두컴컴하여지며 먹구름이 깔려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여 지척을 가릴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번쩍이는 번갯불과 뇌성과 벽력은 천지를 두 쪽으로 가르듯이 하였다.
혼비백산한 동복현감은 어느 민가 안방으로 숨어버렸다.
몇시간이 지난 뒤에는 무등산이 무너지는듯한 우뢰소리도 그치고 말갛게 밝아왔다.
뒷날 사람들이 못을 찾아가보니 백룡은 온 데 간 데 없고 맑은 물은 흙탕물이 되어 비연의 시체만 처절하게 물위에 떠 있었다.
비연의 시신을 부근에 장사지낸 동복현감은 옷깃에 눈물을 적시며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그뒤에도 가뭄이 들어 농사짓기가 어렵게 되면 고을사람들이 모여 거기에 가서 기우제를 모시면 하늘이 비를 주었으며 몇해전까지만 하여도 거기서 가뭄에 기우제를 지냈다.
그때부터 그 못을 용이 살다 갔던 곳이라 하여 용소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옛 사연과는 아랑곳없이 쓸쓸하고 초라하게 이름만 전하고 있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