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에서 보성행 버스를 타고 줄 곧 가면 사평이란 곳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 한참 산 모퉁이를 돌아 가노라면 아담한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이 옛날에는 청룡골이라 불렀던 대곡리이다.
일명 벽력(霹靂)골이라고도 한다.
뒷산의 모습이 용을 닮았대서 청룡골이라 불렀다고도 하며 옛날 이곳에 있는 못에서 푸른 용이 하늘로 올랐다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마을에는 차마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전설이 숨어 있다.
옛날 한 젊은 부부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슬하에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워낙 귀하게 얻은 자식이라 부부는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하여 이 아들을 길렀다.
정이월이 지나고 삼월의 어느날, 아이의 할머니는 손자가 보고 싶어 따뜻한 봄볕에 종달새 울고 민들레 피는 산길 들길을 걸어 이곳 청룡골 아들 집에까지 오게 되었다.
아들도 아들이려니와 우선 손자를 어서 안아보고 싶어서 걸음을 재촉한 것이었다.
싸립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어린 손자를 껴안고 할머니는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날마다 손자와 더불어 소일을 하는 일이 할머니는 더없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날 봄볕이 포근하여 참으로 양춘가절이라 앞 빈 터에는 마늘이 파릇파릇, 뒤뜰에는 머우솔의 파란움이 풍성했다.
따뜻한 햇빛에 장독을 열고 장을 달이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온 마을에 퍼지고 있었다.
이 집에서도 며느리는 장독 옆에 솥을 걸어 놓고 불을 피워 장을 달이기 시작하였다.
익숙한 솜씨로 며느리는 가마솥에 불을 지퍼 장을 끓여 내고 또다시 부어 끓여내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삿날에 사돈온다＞는 겪으로 그 바쁜 틈에 마굿간의 소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 나가버린 것이었다.
서둘러 며느리와 아들은 뒤쫓아 따라 갔으나 소는 한없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달이던 간장을 그대로 놔둔 채 며느리가 소를 잡으러 나가버리자 집에 남은 할머니는 그 일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등을 숙이고 열심히 간장을 젓고 있는데 그만 등에 업었던 어린 애가 할머니 등에서 빠져 거꾸로 뜨거운 장솥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 에그머니! 」
할머니는 정신없이 어린 애를 끓는 장 속에서 건졌으나, 아이는 울음 한번 울지 못하고 경각에 숨을 거두었으니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비참한 참상이었다.
할머니는 실성한 사람이 되어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리저리 마당을 뛰어 다니다가 손자의 시체를 안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들과 며느리가 돌아왔다.
이 참경을 본 며느리는 기절하여 쓰러져 버리고 아들은 죽어 있는 자식을 보더니 꿩을 보던 매처럼 얼굴에 독기가 서리었다.
그는 이빨을 으드득 깨물고 와락 달려들더니 죽은 자식의 팔뚝을 뚝 찢어들고 얼이 빠져 서 있는 어머니 앞에 불쑥 내밀었다.
「 어서 잡수시오! 」
그는 살기가 가득찬 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소견이 어둡고 무식하여 완맹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러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늦게야 이 참상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위로하며 모두 슬퍼하고 있을 때였다.
청룡고을 뒷산에서 청천백일의 뜨거운 햇빛이 쨍쨍 쪼이는 정오에 안개 내리듯 먹구름이 마을을 감싸며 요란한 괴음과 더불어 뇌성벽력이 치는 것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 안방으로 부엌으로 모두 피하여 덜덜 떨었다.
번개불이 이집 마당에 번쩍번쩍 치며 폭우가 쏟아져 앞 뒤를 가릴 수 없었다.
갑자기 일어난 천지의 진동은 한참동안 계속 되었다.
번갯불과 비가 그치며 하늘은 다시 개어 청천백일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숨을 돌리고 숨어 있던 자리에서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모두 알 수 없는 괴변이라고 눈이 휘둥글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좌우를 살폈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시체와 장독, 그리고 그 집까지 모두 흔적도 없이 쓸어다 마을 밖에 있는 웅덩이를 메워버린 것이었다.
그뒤 아들은 이상하게도 반신불수로 고생하더니 벙어리까지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였다.
하는 수 없이 비참한 형색으로 그날 그날을 살아 가는데 어느날, 스님 한 분이 지나다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당신 부모에게 불효하여 하늘에서 벌을 준 것입니다. 」
스님은 하늘에 기도 드릴 것을 부탁하였다.
아들은 크게 뉘우쳐 깨닫고 다음날 제수를 준비하여 뒷산 정결한 곳에 자리잡고 하늘을 우러러 정성껏 제사를 올렸다.
그토록 무지하고 불효한 인간의 기도에도 하늘이 감동한 바 있어 며칠 뒤 꿈에 옥황상제께서 나타났다.
「 오늘로써 너의 병을 고쳐주고 다시 아들을 하나 줄테니 잘 길러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 뒤 그의 병은 모두 나았고 다시 아들도 하나 얻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청룡골 주민들은 아는 이 없고 외부의 팔순노인들 몇분만이 전하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