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5(화) 11:04
이 골짜기엔 큰 괴암이 있어 이름하되 서방바위와 각시바위라는 것이다.
서방바위는 바른편 함풍이씨 세장산 아래 높이 서 있어 망건 위에 상투의 동곳까지 하고 그 아래 왼편 각시바위란 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각시바위는 경대바위 빗바위를 옆에 두고 서방바위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어 미소를 절로 머금게 한다.
옛날 이 아래 마을에 황부자가 살았는데 이 집에 돌덕이란 떠돌이 머슴 하나가 찾아들어 주인을 정하고 풀도 베고 쇠죽도 끓이며 바깥 머슴이 되었다.
머슴이 하루는 집 후원에서 나무 밑을 청소하다가 별당에서 글 공부하는 규수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되었다.
유두분면에 맑은 눈동자와 단아한 자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아니할 수 없도록 예뻤다.
격언에 금수도 빛을 보면 호부를 가릴 줄 안다는데, 하물며 머슴도 사람인지라 어찌 느낀 바가 없었으랴.
머슴은 그날밤 이 아름다운 규수의 환상때문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머슴은 또 후원을 찾아가 처녀를 보았고 또 다음날 다시 그 다음날......
날이 갈수록 처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야릇하고 달콤했다.
그것은 돌덕이 뿐만 아니라 사람이 별로 없이 한적한 곳에 홀로 있어 외로운 처지라 처녀도 역시 싫어하는 내색은 아닌 것 같았다.
천한 몸으로 생각지도 못할 일이나 정에는 역시 경계가 없었다.
돌덕이는 후원 일을 보살핀 척 하며 별당 구경을 가는 것이 매일의 일과가 되었고 끝내는 밤낮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남의 눈을 피하며 보는 눈길은 어언간 미소로 변하였고 그 미소는 다시 은밀한 대화로 통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돌덕이는 처녀로 부터 남의 눈을 피하여 밤마다 천자를 배우기로 하였다.
밤마다 야심삼경이면 아무도 모르게 글을 가르치고 베우는데 돌덕이는 하나를 물어 열을 아는 재주가 있었다.
처녀 역시 돌덕이의 비범한 재주에 감탄하였고, 날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쏠리게 되었다.
참으로 때 없이 순수한 애정이 장막을 뚫고 싹트더니, 날이 갈수록 두사람의 사이는 깊고 뜨겁게 되었다.
어느날 호사에는 다마라.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황부자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돌덕이를 헛간에 감금시켜 볼기와 종아리를 터지도록 때려서 내쫒아 버렸다.
그러나 돌덕이는 처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고 그 마을에서 걸식을 하며 밤낮 처녀 생각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돌덕이가 야음을 틈타 용기를 내어 처녀방을 다시 찾아들었다.
「 제 처지로는 생각지도 못할 사랑이지만 마음의 정을 버릴 수 없으니 아마 전생의 인연인가 합니다. 이 인연이 현세에서 못 이뤄질 바에야 먼저 가서나 기다리겠읍니다. 」
그는 눈물로 호소하고 나서 그길로 화살처럼 달아나 버렸다.
당황한 처녀는 밤이어서 붙잡을 수도 찾을 수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돌덕이의 자결한 시체가 앞산의 바윗골에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 처녀는 괴로와 견딜 수 없었고 그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몸부림쳤다.
먼저 저승에 가서 기다리겠다는 그 소리가 귓전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처녀의 몸은 날이 갈수록 쇠약하여졌고 온갖 치료의 보람도 없이 그녀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아버지, 저는 돌덕이를 찾아 가겠사오니 돌덕이 옆에 묻어 주십시요.」
숨을 거두며 이렇게 말했다.
황부자는 죽은 자식의 유언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과연 돌덕이 옆에 묻어 주었다.
그런 뒤의 어느날, 금방 소나기라도 쏟아질듯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어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마을 건너편 산골짜기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마을 앞에 나와 살펴보니 난데없는 도깨비 수백명이 영차, 영차 하고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무엇인지 무거운 것을 옮기고 있었다.
이튿날 찾아가보니 산등성이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커다란 바위 두개가 놓여 있었다.
그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의 이름을 서방바위와 각시바위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생전에 뜻을 못이룬 돌덕이와 처녀의 화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소나무 숲속에 어름, 다래 나무등 이름 모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발길을 막는다.
그리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각시바위에는 칡덩굴과 담장이가 칭칭 몸을 감았는데 서방바위 상투에는 솔바람 소리만 이따금 스쳐간다.
두사람의 애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나무꾼의 유행가 소리가 구성지다.
화순뉴스 hsnews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