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읍에서 능주도로(綾州道路) 를 향하여 가면 내평리(內坪里) 란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옛날 어느 청춘남녀의 애달픈 전설이 숨어 전하고 있는 샘이 하나 있어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옛날에는 가림역(加林驛) 이란 역관(驛○) 으로 부근에는 노복(奴僕) 노비(奴婢) 들 백여명이 수십 필의 말을 보살피며 관가의 통신을 돕고 있었다.
당시 가림역 인근의 마을은 몇몇의 중인들과 넉넉치 못한 농토를 가꾸어 생계를 이어온 상민(常民) 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노복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노비를 지원하는 사람은 적었다.
지원한 노비들은 중년부녀들로서 취사와 잡역을 도울뿐 관원들을 응대하며 보필할 얌전한 처녀는 별로 없었다.
관가(官家) 에서 고심한 끝에 할 수 없이 역관에서 영을 내려 강제로 처녀들을 선발하여 끌어왔는데 끌려온 무리속에는 사촌(沙村) 에 사는 옥녀라는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이름 그대로 옥과 같이 하얀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한 어여쁜 처녀였다.
얼굴만이 고운것이 아니라 몸가짐도 단정하고 어른들에게 공손하여 마을 사람들과 인근 고을의 사람들에게까지 칭송을 받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뭇사내들의 시선의 꽃이 되어 아내로 맞을 갈망의 대상이 된 열일곱의 처녀였다.
그러나 미인유한(美人有恨) 이라 했던가.
옥녀에게는 남모르게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총각이 있었다.
화창한 어느 봄날 만산의 잠이 깨어 나뭇가지가 파릇파릇 바야흐로 만화방창의 호시절 일이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무재등으로 고사리를 캐러 갔었다.
고사리와 산나물을 캐기 위해 그녀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오르내렸다.
고사리와, 원추리, 취나물, 괴춤나물, 여러가지 향기로운 나물을 보자기에 한아름을 캐서 묶어 놓고 같이 왔던 친구를 찾아 보았으나 깊은 산에 서로 흩어져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불러보았으나 대답도 없어 마음은 더욱 촉급하였다.
빨리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옥녀는 길을 찾아 산길을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소나기가 갑자기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더욱 바빴으나 하늘은 어두컴컴하여 앞을 가릴 수 없이 비가 쏟아졌다.
그녀는 마음이 급하여 때마침 큰 바위를 발견하고 그 바위밑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그 바위 아래는 어떤 총각이 소나기를 피하여
먼저 찾아와 앉아 있었다.
옥녀는 깜짝 놀랐으나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황급한 판국에 다른 곳으로
피할 길이 전혀 없었다.
앉아있던 총각은 얼른 일어서면서 옆자리를 양보하였다.
「 어서 이곳으로 오십시요.」
옥녀는 아무 말없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앉아 있었다.
옆눈길로 살펴보건데 총각은 표정이 맑고 준수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다시 태산이 무너진듯 우뢰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옥녀는 깜짝 놀라 조금씩 다가앉았는데 옆자리의 총각은 알고 보니 이웃 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다.
한참 후에 총각이 입을 열었다.
「 사촌사시는 옥녀란 분이지요?」
「...... 」
실로 어색한 분위기였으나 총각과 옥녀는 하늘의 인연이었던지 훈훈한 열기가 돌았다.
비에 젖어 있는 옥녀의 몸에서 혈열(血熱) 이 생긴 듯 짙은 분냄새가 풍기어 총각의 코를 찌른다.
총각의 콧속을 뚫고 들어오는 분냄새는 마음의 깊은 곳까지 뒤흔들어 점점 정신을 현란케 하는데 이때 먹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터지면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굴러왔다.
「 에그머니!」
옥녀는 깜짝놀라 총각을 붙잡고 뒤로 물러섰다.
총각도 또한 무의식중에 옥녀를 두팔로 껴안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사람의 몸에서는 뜨거운 열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면서
두 피부가 접착되어 있는 그 일부분을 통하여 야릇한 전열(電熱) 이 교류되고 있었다.
재빨리 전도되는 심장의 고동은 점점 거칠어지며 참을 수 없는 격정에 두사람은 빠져 들었다.
총각은 경황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 어찌된 일인지 옥녀의 유방을 자신의 다섯손가락이 감싸주고 있지 않는가.
총각은 깜짝놀라면서도 은근히 엄동의 양달볕에 포근하고 오붓한 환희를 완미하는 느낌이었다.
봉황새깃인들 이보다 부드러우며 그 어느 보배를 손에 쥔들 이보다 조심스러우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오묘한 정은 옛 오작교의 그 여인들이나 맛보았을런지... 가슴들이 두근거리고 파도처럼 거세게 밀어닥치는 젊음의 욕정은 신비와 황홀의 소용돌이속으로 끝없이 침몰되었다.
두 남녀는 소나기도 잊어버리고 몇시간이 지난 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개어있었고 산빛은 더욱 맑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총각은 서운한듯 입을 열었다.
「 오늘의 인연으로 하늘을 우러러 약속합시다. 」
「...... 」
옥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으나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 뒷산에서...... 」
그들은 십오일밤 뒷산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산아래서 헤어졌다.
그뒤로 그들은 자주 만나 달콤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결혼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가림역의 관원들이 옥녀를 노비로 선정해 버린 것이었다.
영을 거역하면 고을 원으로부터 내리는 형벌로 부모에게까지 중형이 내리므로 어찌할 길이 없었다.
밤낮으로 고민하였으나 묘책이 없었다.
이윽고 관원이 찾아왔다.
옥녀는 하는 수 없이 울면서 역관으로 따라 들어갔다.
초라하고 쓸쓸한 노비들의 행색은 불쌍하기만 하였다.
옥녀는 옆에 있는 노비에게 물었다.
「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됩니까? 」
「 당신은 오늘밤부터 저 관원에게 몸바쳐 시중을 먼저
올려야 합니다. 」
옥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앞이 캄캄했다.
서산에 곱게 타오른 저녁 노을도 어느덧 사라지고 곧 황혼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좀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는 용기를 내어 역관을 탈출했다.
막상 나왔으나 갈길이 막연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처녀의 몸으로 아무데나 들어갈 수도 없었다.
당장 내일이면 다시 붙잡히게 될 것이었다.
몸바쳐 약속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한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겨 마을의 우물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여 본다.
부모, 형제, 약속한 그사람......
눈물은 다시 비오듯 그칠줄 모르고 흘렀다.
이윽고 한밤중이 되자 그녀는 혀를 깨물고 우물속으로
몸을 던져 버렸다.
그녀는 아득한 길을 가는 것이었다.
다음날, 이 소문이 퍼지자 놀란 총각이 허겁지겁 우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역시 몸을 던져 옥녀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두남녀는 함께 죽음을 택했는데 그뒤 어느날
아침 햇살에 그 샘으로부터 하늘에까지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놓이고 처녀 총각이 샘속에서 나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가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부디 도솔천국(○率天國) 으로 올라가 영화를 누리도록 빌었다.
그뒤부터 이 샘을 무지개샘이라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