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현종(李朝 顯宗) 때의 문신(文臣) 으로 자(字) 가 대이(大而) 였던 홍기천(洪沂川) 은 1644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시교(奎章閣試校) 교리(校理) 부수찬(副修撰) 을 지낸 후 이조좌랑(吏曹佐郞) 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를 적발하는데 당대에 명성을 떨쳤으며 동부승지(同府承旨)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형조판서(刑曹判書) 를 지내고 우의정에서 다시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후일에 문간공(文簡公) 시호(諡號) 를 받았다.
초직 화순현감(和順縣監) 으로부터 당당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현 군수의 직급에서 국무총리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 이 범중(凡衆) 을 초탈(超脫) 하여 비범한 문신으로서 일찍부터 세상을 놀라게 한 명관으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형안(炯眼) 으로 보는 선견지명은 효종(孝宗) 의 깊은 신망을 얻어 정사(政事) 를 논한 명상이기도 하였다.
서기 1647년 정해(丁亥) 정월 하순에 부임하여 이듬해 칠월에 홍문수찬(弘文修撰) 으로 승진 되었다.
이 짧은 기간에 높고 큰 업적은 흠앙(欽仰) 치 않은 이가 없어 청덕비(淸德碑), 숭유비(崇儒碑) 등 생사(生祠) 까지 모셨으니 그 덕망(德望) 은 가히 알만하다.
현감이 화순고을에 부임하여 빈향(貧鄕) 으로 곤궁한 백성들의 실정을 직시하고 곧 상(上) 에 주(奏) 하여 삼년간 면세를 받아 연례로 당하는 춘궁기(春窮期) 의 기아걸사자(飢餓乞死者) 를 없앴으며 전답의 세(稅) 로 올리는 납곡(納穀) 을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 진조창(陳租倉) 까지 인력으로 끌어다 바치는 데는 교통난과 더불어 무거운 폐단이었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금납제(金納制) 로 전환(轉換) 하여 줄 것을 간청하여 특혜를 받았으나 향교의 대성전(大成殿) 이 퇴락(頹落) 되어 청빈한 고을 사림(士林) 의 힘으로는 불가항력(不可 抗力) 이었다.
이를 보고 현감은 급히 조정으로 부터 많은 역자(役資) 와 중수(重修) 에 대한 지원을 받아 대성전, 명륜당(明倫堂) 만화루(萬化樓) 등을 중수하였고 대성전의 토기 제구(祭具) 일절을 모두 목기(木器) 칠기(漆器) 로 바꾸었고 제복(祭服) 도 모두 새로 지어 마련하였다.
그 때의 한 일화로 정해년(丁亥年) 큰 가뭄에 도도처처에 한해가 들어 고을은 참으로 화택강산(火宅江山) 이 되어 있었다.
이때 현감은 친히 목욕재계하고 천제(天祭) 를 모시었다.
그러나 하늘은 응험(應驗) 이 없어 다시 산상영대(山上靈臺) 의 기우단을 찾아 삼사차 기도를 올렸으나 종무반응(終無反應)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성, 순천, 담양, 장성등 타 지방들은 비가 많이 내려 고을의 원성이 그쳤는데 어찌된 일인지 화순만은 한재가 계속되어 고을 주민들의 탄식은 날로 더하였다.
현감이 친히 꽃뫼(南山) 등을 올라 사방을 살펴 본 바 논과 밭이 불빛이며 밭둑과 논둑에는 부녀자가 발을 펴고 앉았는데 그 애통한 곡성은 목불인견이요, 이불인청(耳不忍聽) 이었다.
현감께서 즉시 동헌(東軒) 으로 돌아와 목욕과 재계로 예를 갖추고 축문을 지었다.
이제는 마지막인 양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 이튿날 현 남산기운단에 설석(設席) 을 마련하였다.
그 아래는 역노 십여명으로부터 신목(땔감) 을 끌어 올려 성지듯 쌓아 놓을 것을 명하였다.
이는 신목 위에 앉아 분신으로 하늘에 고할 뜻이었다.
그후 제에 임하여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 천제께 고하옵건데 오직 사람이 살고 망하는 것은 모두 하늘에 있는 바 하늘의 뜻을 거역하여 어찌 살 수 있으리요.」
하늘의 현묘한 기운으로 지어진 만물 가운데 사람이 더욱 중하다 하였으니 천명을 또한 가장 중히 여긴 자 사람으로 하늘의 뜻을 순(順) 히 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가 또한 사람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므로 이 고을 백성을 대신하여 수차 예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어 주시지 않으심은 필시 다름아닌 천상에 획죄(獲罪) 한 무덕지인(無德之人) 이 이 고을을 맡아 살피고 있어 천제께서는 오직 정성이 부족하여 비를 주시지 않으십니까?
이 죄인이 거(居) 하여 불고(不顧) 하심을 만시(晩時) 에 내각(乃覺) 하였으니 저는 어느 고을에 수임(受任) 되나 하늘이 돌아 보시지 않으실 것이요. 화급사린(禍及四隣) 할 것인 바 오늘 저의 몸을 바쳐 이 고을 백성에게 천제께서 비로소 복(福) 을 나리신다면 이 어찌 살신성인(殺身成仁) 이 아니겠읍니까?......」
현감이 반읍독축을 하니 홀연 능주지방에서 검은 먹구름이 일어나 잠시후에는 천지가 컴컴하게 뒤덮여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이 비는 해갈이 아니라 연일 내려 그 해는 백곡풍등(百穀豊登) 이 되었다.
이처럼 선정을 베품에 고을 백성들은 모두 감복한 나머지 비(碑) 를 세워서 그 높은 공덕을 뒷 사람들에게 전하자는 중론이 되었다.
이에는 유림에서 부녀자까지도 뜻깊게 환영하며 이 마을 저 마을 동면(東面), 서면(西面), 읍내면(邑內面) 할 것 없이 산골 적은 마을까지도 마을 앞에 비를 세우기로 결의가 되어 마을마다 열성을 다하여 비석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 때 홍기천(洪沂川) 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극히 사양하여 금지하도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은 판수 농아처럼 아랑곳 하지 않았다.
불꽃 튀기듯 사람들의 열성은 더욱 치솟았다.
이토록 순수한 뜻에 벌을 내릴 수 없는 일로서 홍기천도 난감한 처지가 아닐 수 없었다.
아침 저녁 이 일에 뜻이 머물러 고심하다가 이윽고 영을 내렸다.
「 그대들의 가상한 뜻을 저버릴 수 없으니 이름을 돌에 각(刻) 하여 세워 주는 것 보다는 나무, 즉 목비(木碑) 로 세워 주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이 말에 고을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목비(木碑) 를 세우기로 하고 심산유곡(深山幽谷) 에서 좋은 목재를 끌어와 목공들의 솜씨로 화순 고을 방방촌촌(坊坊村村) 의 적은 마을까지도 목비(木碑) 가 세워졌다.
비를 세운 뒤 경축행사로 비(碑) 앞에서 풍물놀이를 하는데 백수안강(百壽安康) 과 가관진록(加官進錄) 을 축원하는 농악놀이었다.
그리고 고을사람들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엄동설한 다 지내고
삼월 춘풍 봄이 왔네.
우리 원님 오시면
천리가 봄빛이요.
우리 원님 가시면
봄도 따라 갈지로다.
하고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후 한달이 지난 어느날 현감은 갑자기 하루 아침에 또 다시 영이 내려 전하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자신의 목비를 향교로 끌어 올리라는 분부였다.
이에 의아한 사람들은 말없이 일시에 뜻을 잃고 어찌 할 줄을 몰랐다.
현감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 그대들의 뜻으로 세운 비는 만천하 사람들은 물론 눈이 있다면 조수(鳥獸) 라도 다 알았을 것이며 명부의 신명까지 다 알았을 것인데 어찌 그대로 오래 세워 풍마우세(風磨雨洗) 하여 목비가 상하면 내 이름까지 상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비에 젖지 않도록 하여야 겠다.」
하고 태연하였다.
이 말에는 의견이 일치되어 모두 비를 뽑아 향교로 옮겼다.
현감은 며칠 뒤 향교에 옮겨 온 비를 살펴 보고 즉시 고을의 목공을 불러 이들에게 목비를 다듬어 줄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이때 향교의 중수사업(重修事業) 을 시작하였다.
대성전 명륜당 만화루를 보수하는데 많은 마루장판이 필요 하였으므로 이 목비를 다듬어 만들 심산 이었다.
과연! 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인가.
돌로 만든 비를 물리치고 목비로 만들도록 하여 대성전 명륜당 만화루에 판목(板木) 으로 이용하였으니 현철한 관찰력은 후일에 재상이 될 자질과 나라를 붙잡을 동량(棟樑) 이 분명하였다.
이처럼 어진 치적(治績) 이 그뿐이 아니었다.
고을 주민들은 생사당(生祠堂) 을 지어 배향하고 다시 공덕비를 세웠으니 현 화순군청 앞에 거북비가 있고 향교에는 숭유비(崇儒碑) 가 서 있다.
만화루 옆에 있던 사당은 우연한 화재에 소실 되었으나 영정만은 후손들이 봉안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고을에 가뭄이 들면 사람들은 홍기천비를 자주 살펴본다.
이 비에 습기가 흘려 땀이 나면 곧 비가 오는 영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년 팔월상정(八月上丁) 에 교리(校理) 뒷산에서 단제(壇祭) 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