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 동면 국동이란 마을이 있다.
화순에서 버스를 타고 광업소(동면)편으로 가노라면 백용리란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서 동북방을 바라보고 가노라면 서성재 저수지에 이른다.
기절한 암벽으로 세워진 이 서성적벽은 금상첨화로 잘 가꾸어져 있다.
서성리 구동을 철거하고 방제를 막아 놓은 후에는 문화유씨의 선조이신 백천공께서 축조하셨다는 환산정이 수중루가 되어 사면에는 청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정자 앞에는 창파가 넘실거려 안계에 가로 질러 보이는 적벽이야말로 아마 백천공께서도 이 승경은 생각지 못하였으리라.
이곳에서 계곡 쪽으로 새마을 도로를 타고 찾아 올라가노라면 국동이란 마을이 거기에 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굴동이다.
마을 뒷산에 큰 굴이 있고 그 굴에는 약수가 있다.
특히 안질에는 물을 먹고 눈을 씻으면 신기하게 잘 낫는다고 한다.
시골의 여인들이 봄 가을이면 목욕재계와 금기로 정성을 들인 후 옷깃을 여며 이 굴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이 굴보다도 동구란의 전설이 더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이 동구란은 원래 중국사람이었는데 어느때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마을의 입구인 산모퉁이 으슥한 곳에 집을 짓고 처자도 없이 외롭게 홀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힘이 무서운 장사요, 얼굴은 옛 관운장의 풍모에 신체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장사, 동장사 하고 받들어 모셨으며 하루에 술 한말 밥 한말씩 먹는 거인이라고 했다.
식량이 떨어지면 마을에 와서 구걸을 하였는데 식사 한끼가 온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양이었다고 하며, 술은 한말을 먹어야 취기가 있었으니 가볍게 모셔다 대접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 때 하필 흉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넘길 길이 막연하여 산나물에 쑥죽으로 연명하는 형편이라 모두 조반석죽이 어려워 사실상 동장사를 기피하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동장사는 행패를 시작했다.
마을 부잣집의 곡식을 빼앗아 먹기 시작하여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온 마을을 더듬어 먹고 사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홀아비로 사는 동장사는 점점 성질이 거칠어져 마을 아녀자까지 거침없이 붙들고 농락하며 겁탈까지 하여 마을은 온통 불안과 공포 속에서 전전긍긍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동장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겁이 났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마을 사람들은 한가지 묘책을 짜내었다.
어느날 술을 잘 마시는 몇 사람의 장정들이 동장사를 속여 화순장으로 함께 나갔다.
「오늘은 제가 술 말쯤은 대접하기 위하여 나왔습니다.」
하고 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동장사는 영문도 모르고 좋아했다.
주모도 이 장사의 몸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목마른 소 시냇물을 마시듯 삽시간에 술 한말을 다 마셔버린 동장사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정들은 동장사에게 자꾸 술을 권했다.
장정들의 속셈을 모르는 동장사는 주는대로 술을 마셔댔다.
몇말이나 되는 술을 먹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취흥이 도도해진 동장군은 국동으로 가는 열두 구빗재를 넘어 마을로 향했다.
마을 어귀 밭 언덕에 동장군이 다달았을 때 마을 사람들은 때를 맞추어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이는 다름아닌 동장사 생매장할 구덩이를 마을 장정들이 파고 있었는데 동장사는
무심히
「저기서 무엇하느냐?」
하고 물었다.
일행들은 아마 어떤 분의 묘를 하는 모양이라고 시치미를 뗐으나 사실은 동장사를 생매장할 구덩이임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우리도 가서 구경하고 술이나 몇 잔 얻어먹는 것이 어떻소?」
일행은 동장사를 유혹했다.
동장사는 쾌히 승낙하며 앞장을 섰다.
일은 점입가경으로 잘 되어갔다.
구덩이 부근에는 돌덩이와 흙더미가 높이 쌓여 있었다.
동구란이 유인되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이윽고 동장사가 나타나자 모두 반가운 빛으로 영접은 하면서도 어딘지 써늘한 기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미리 준비한 독주를 큰 그릇으로 마시게 하여 정신이 몽롱해진 동장사를 구덩
이 가까이 끌고 가며 이르기를
「이 일은 다름 아니라 부근에 늙은 호랑이가 살고 있어 이를 잡기 위한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동구란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빼고 깊은 웅덩이를 살펴보는 순간, 몇 장정들이 동장사의 등을 밀어버렸다.
그 뒤 수십 명의 사람들은 노적처럼 쌓아놓은 돌덩이를 모두 구덩이에 집어 던졌다.
큰 돌을 수십명의 장정들이 쓰레기 버리듯 던지는데 동장사는 날아오는 돌덩이를 하나도 실수하지 않고 다시 밖으로 던지는데 민첩하기 번개같은 손길을 보는 자를 아연케 하였으며 그 무거운 돌을 받아 던지는 힘은 차력의 신술이나 되는 듯 했다.
범인의 생각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러나 장정들은 더욱 힘을 내어 돌들을 소나기 퍼붓듯 집어던졌다.
만약 동장사가 살아날 때에는 마을사람이 한사람도 살수 없으니 생사를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죽을 힘을 다 한 공방전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자 동장사는 마침내 힘이 늘어졌다.
받아넘기던 돌도 하는 수 없이 발 뿌리에 쌓이고 머리와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으며 발 뿌리에 쌓였던 돌덩이가 허리에 쌓였고 다시 가슴까지 닿더니 마지막에는 석장을 당하고 말았다.
큰 뜻을 모아 동장사를 생매장시킨 마을 사람들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돌아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올라와 보았다.
돌무덤은 돌이 움직이며 꿈틀거렸다.
동장사가 돌무덤 속에서 아직 죽지 않고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무덤은 계속 사흘동안이나 돌이 움직였다고 한다.
동장사는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불안은 이제는 다 없어진 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마을 사람들이 혹 이 부근을 지나가면 반드시 병을 얻어 고생을 하는데 백약이 무효였으나 이 무덤에 술과 밥으로 고사를 지내면 비약자유로 병이 나았다.
그때부터 이 무덤을 지나다가 병이 생기면 모두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지금도 당시 제기로 쓰였던 그릇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한다.
이젠 옛 노인들의 말씀 속에 전할뿐 요즈음은 동구란의 이름조차 아는 이 하나 없다.
돌무덤 옆에는 칡덩굴만 뒤틀려 너울거리고, 고요한 산골에는 무심한 꾀꼬리의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그러나 산골의 물소리는 옛날의 사연을 간직한 듯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